• [장훈 칼럼] 협치의 성공 조건 두 가지

    장훈 본사 칼럼니스트·중앙대 교수 취임으로부터 거의 2년이 걸렸다. 윤석열 대통령이 트루먼의 교훈을 깨닫는 데까지. 미국의 33대 대통령 트루먼은 한국전쟁에 미군 파병을 결정했던 냉전의 설계자로 유명하지만, 대통령 리더십에 대한 통찰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대통령은 지시한다. 그리고 다시 또 지시한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권위에 의존한 하향식 정책 결정으로는 일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점을 트루먼은 꿰뚫어 보았다. 관료들뿐만 아니라 여러 이해 당사자들을 설득하지 못하면 대통령의 정책은 표류할 뿐이라고 본 트루먼의 통찰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  「 2년 만에 본격적인 협치 첫 시도 협치에는 함정도 위험도 적잖아 협력 게임의 복잡성 받아 들이고 공통이해를 찾는 과정이 곧 협치 」    2년 만에 윤 대통령은 리더쉽 1.0에서 2.0으로 변화를 시도하는 중이다. 총선 “민심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경청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오늘(29일)은 취임 이후 처음으로 거대 야당 대표와 정책협의 회동을 갖는다. 그동안 언론과 전문가들이 숱하게 주문해 온 협치의 길이다.    협치의 길은 다수가 바라는 바른길이다. 하지만 그 길은 정글을 헤쳐가듯 험난한 길이다. 뜻밖의 함정들도 있을 것이고(거대 야당 그리고 여당), 비를 피하기도 쉽지 않다(언론과 여론의 비판). 오직 대통령 혼자서 헤쳐가야 하는 거친 길이다.   대통령이 주도하는 협치의 성패는 결국 ①여당, 야당, 여론과 벌이는 복잡한 협력 게임의 운영과 ②대통령의 정치적 자원(지지율, 권위, 설득력)의 효과적인 운용에 달려 있다. 협치 성공의 두 가지 조건을 하나씩 살펴보자.   먼저 주요 당사자들의 협력 게임의 구조. 협치의 첫 단추라고 할 수 있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의 만남은 외관처럼 1:1 협상의 단순한 구도는 아니다. 협상에 임하는 이 대표가 전적인 자율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당을 지탱하는 열렬 지지자들이 수용 가능한 범위 안에서만 윤 대통령과 타협을 주고받을 수 있다. 예를 들자면 민주당이 총선 때 맨 앞에 내세웠던 민생 지원금 25만원 전국민 지급에 타협의 여지는 얼마나 될까? 이 대표는 어려운 국가재정 형편을 고려해서 지원금 지급 대상을 대거 축소하거나 차등 지급하는 타협에 선뜻 합의할 수 있을까?   정치학자들이 흔히 양면 게임이라는 부르는 이차원 협상은 윤 대통령에게도 마찬가지로 작용한다. 쟁점 특검 등 다른 사안을 양보받는 대가로 25만원 지원금을 전 국민에게 차등 없이 지원하는 데에 합의할 수 있을까? 윤 대통령은 지난 2년간 정부 재정의 엄격 집행을 강조해 왔고 선심성 현금 지급을 비판해 왔는데, 급격한 방향 전환에 나설 수 있을까? 방향을 선회한다면 어떤 논리로 핵심 지지층을 설득할 수 있을까?   윤 대통령과 이 대표가 마주한 양면 협상을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요소들은 더 있다. 4월 총선에서 비례득표 24%를 얻은 조국혁신당의 존재는 과연 민주당이 여야 협상 과정에서 쓸 수 있는 레버리지일까 혹은 부담일까? 조국혁신당의 협력적 견제가 민주당의 협상 입지를 넓혀줄 가능성은 크지 않을 것이다.   협치의 성패를 좌우하는 두 번째 요소는 대통령 권력자원의 속성과 운영이다. 마치 자연의 법칙과도 같이 대통령의 권력자원은 시간이 흐를수록 줄어들기만 한다. 권력자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지지율, 남은 임기, 대통령 개인의 카리스마는 꾸준히 우하향하기 마련이다. 실제로 윤 대통령의 지지율, 여권 내의 카리스마, 남은 임기는 지난 2년간 꾸준히 하향세를 그려왔다. 지난 총선 결과 역시 이러한 하향세의 한 흐름이었다.   그렇다면 위축되는 권력자원을 갖고 협치에 나서는 윤 대통령의 입지는 계속 좁아지기만 하는가? 곤경을 헤쳐갈 방안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길은 대통령만이 가진 권력, 그 권력을 행사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동안 윤 대통령의 권력에 대한 접근은 수직적이었다. 피라미드의 꼭대기에서 대통령이 결정하면, 관료조직이 시행하고 친윤들이 행동한다. 그에 따라 부과되는 정책들로 민생을 살핀다는 것이 수직적 접근의 핵심이다. 하지만 난마처럼 얽힌 의-정 갈등, 대학입시 사교육 혁파 시도 등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듯이 수직적 권력 행사는 한국 사회에서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   민주사회에서 대통령 권력은 쌍방향 교환을 통해서만 작동한다는 점을 받아들이면, 지금의 흐름을 바꿀 수도 있다. 대통령으로서 갖는 각별한 지위를 기반으로 실제 일하는 이들과 정성껏 소통한다면 대통령의 정책목표와 이해 당사자들의 직업적 동기, 정치적 이익의 교집합을 꾸준히 찾아낼 수 있다. 대통령실 참모들, 관료들, 야당, 여당 의원들, 정책 당사자들에게 끊임없이 대통령의 목표를 제시하고 그들의 직업적, 정치적 이해관계와의 공통분모를 찾는 과정 자체가 곧 민주사회에서 대통령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트루먼의 교훈에 다가갈 때, 윤 대통령도, 한국 정치도 무언가 변화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장훈 본사 칼럼니스트·중앙대 명예교수

    2024.04.29 00:38

  • [고현곤 칼럼] 그들만의 참호에 갇힌 윤석열 정부

    고현곤 편집인 서울대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경제부처 관료를 지낸 사람의 회고다. ‘우리 부처는 경기고-서울 법대 아니면 명함도 못 내밀었어요. 서울 법대 출신이 서울 상대를 우습게 여길 정도였습니다. 출근 첫날 자기소개서를 제출했더니 과장이 부르더군요. 출신 대학이 서울 상대일 텐데, ‘이응’ 받침을 빠뜨려 사대로 잘못 썼다는 겁니다. 사대가 맞다고 했더니 순간 과장의 얼굴이 일그러졌습니다. 감히 여기가 어디인 줄 알고 왔느냐는 표정이었습니다. 평생 학벌 콤플렉스에 시달렸습니다.’ 학벌을 유난히 따진 드림팀(?) 경제부처는 외환위기를 막지 못했다.     ■  「 ‘학교공부 1등=세상 1등’은 큰 착각 지역 남녀 학교 다양해야 강한 조직 윤 대통령, 학벌·출신·인연 매달려 그걸 깨야 국정 운영도 바뀔 수 있어 」    학교 공부 1등이 모인다고 뭐든 잘하는 것은 아니다. 비슷한 사람끼리 있으면 사고의 틀이 닮아간다. ‘우리가 최고’라는 집단 최면으로 현실에 안주한다. 학교 선후배로 얽혀 있어 ‘노’라고 하기도 어렵다. 어느 조직이나 학교, 지역, 남녀, 세대를 골고루 품어야 강해진다. 다양한 의견이 나오면서 최적의 해법을 찾을 수 있다. 특정 학교 출신이 몰려 있거나 지역색이 짙은 조직은 위기에 약하다. 기업 중에는 대우와 금호가 그랬다. 야구팀 1~9번을 홈런 타자로만 채우면 강팀이 될 수 없다. 대학도 타교 출신 교수를 많이 채용해야 학문의 폭이 깊어진다. 순종보다 잡종이 강한 법이다.   사람은 누구나 한두 가지 재주를 타고난다. 공부는 시원찮아도 지혜로운 사람이 있다. 겸손, 배려, 책임감, 추진력, 감성…. 이런 덕목이 시험 문제 몇 개 더 푸는 ‘공부 머리’보다 중요하다. 나이가 들면서 숨은 재능을 만개하는 사람도 많다. 대학 간판 하나로 섣부르게 재단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정부처럼 여러 분야를 다루는 조직에선 말할 것도 없다.   윤석열 정부는 처음부터 서울 법대와 검사 출신 일색이었다. 다들 걱정했지만, 대통령은 눈치 안 보고 이들을 중용했다. 권력이 영원할 것 같은 기세였다. 공부 1등이면 세상에서도 1등이라고 여겼는지 잘 모르는 분야까지 이들로 채웠다. 눈치 빠른 기업도 검사 출신을 늘렸다. 정부에 고시 붙은 사람, 갑의 지위를 누린 사람, 상명하복에 익숙한 사람이 모였다. 여기에 대통령이나 김건희 여사와 개인적 인연이 있는 사람이 더해졌다. 사시 공부를 같이했거나 일하다 만났거나 동창, 고향 친구까지. 철저하게 대통령 부부 중심의 아주 좁은 인재풀이었다. 대통령은 “인사 기준은 전문성이고, 학벌은 안 따진다”고 말했다. 그 말에 동의하기 어렵다. 설령 그렇더라도 국민이 불편하게 여기면 조심해야 했다.   정부가 대놓고 학벌과 출신, 인연을 따지자 국민은 새삼 절감했다. 우리 아이는 좋은 대학에 보내야겠다고. 사교육 열풍이 더 세졌다. 대통령이 수능에서 킬러 문항을 빼라고 지시했지만, 병 주고 약 준 셈이다. 학벌 우선 사회에서 뭐를 한들 사교육이 잡히겠나. 경쟁에 내몰릴 걸 생각하면 아이를 낳고 싶겠나.   똑똑한 사람이 모였다는 정부가 눈치 못 챈 게 있다. ‘그들만의 리그’를 지켜보면서 민심이 떠나고 있었다. 대통령 주변이 거대한 기득권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대통령이 기득권 타파를 꺼내 들면 ‘누가 누구를 탓하나’라는 반감이 들었다. 집권 초기부터 대통령 지지율이 30%대에 그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총선에서도 여당은 한동훈 비대위원장부터 출마자까지 검사 출신이 많았다. 그 와중에 대통령과 한 전 위원장의 사이가 틀어졌다. 온통 검사 출신만 보이는 게 못마땅하던 차에 다투기까지 하니 어처구니없었다. 총선은 처음부터 지고 들어간 싸움이었다.   민심 이반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통령은 연초부터 민생토론회로 전국을 돌아다녔다. 대통령은 “국민만 바라본다”고 했다. 잘 짜인 연출만으로는 마음을 얻을 수 없다. 대파 875원 발언은 전후 맥락을 보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다. 일이 커진 건 국민과 대통령 사이에 신뢰가 없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자신을 내려놓고, 고개를 숙이는 데 익숙하지 않은 듯하다. 김 여사 명품백은 사과 시기를 놓쳤다. 이태원 참사도 행정안전부 장관 같은 고위층 누군가가 책임져야 했다. 아무도 사과하지 않고, 책임지지 않으면 앙금이 남는다. 국민은 벼르고 있다가 총선에서 표로 갚아줬다. 회초리 맞을 걸 피하다 몽둥이로 맞은 셈이다.   대통령은 2년 전 취임사에서 “각자가 보고 듣고 싶은 사실만 선택하는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고 했다. 지금 대통령 주변의 모습 아닌가. 학벌, 출신, 인연으로 쌓은 참호에서 끼리끼리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듣고 싶은 말만 들은 건 아닌가. 총선 참패 후에도 대통령은 별로 바뀐 게 없다. 다음 날 56자짜리 성의 없는 대독에 이어 1주일 후 ‘비공개 사과’로 실망을 키웠다. 안 하느니만 못한 사과였다. 지지율이 23%까지 추락한 지난 주말, 대통령이 영수회담을 제안했다. 낙선자를 만나 쓴소리를 듣겠다고도 했다. 마음에서 우러나 흔쾌하게 하는 건지 아직은 긴가민가하다. 왠지 궁여지책 같다.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지 않으려면 참호를 확실하게 깨고 나와야 한다.     고현곤 편집인

    2024.04.23 00:45

  • [이하경 칼럼] 윤석열 대통령이 진정으로 강해지는 길

    이하경 대기자 윤석열 대통령이 드디어 제1 야당인 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만난다. 잘된 일이지만 황금 같은 지난 2년의 국정동력 손실은 안타까운 일이다. 총선 참패 엿새 만에 국무회의 모두발언 형식으로 나온 대국민 메시지도 실망스러웠다. 번역기로 돌린다면 본심은 “나의 국정 방향은 옳았고, 최선을 다했지만 국민들이 알아주지 않아서 서운하다”였다. 네 시간 뒤 참모들이 전해 준 “죄송하다”는 표현에는 진정성이 없었다.   대통령은 총선 참패로 드러난 민심 이반에도 불구하고 정신 승리의 초현실적 세계에 머물고 있었다. “경제적 포퓰리즘은 마약과 같은 것”이라며 야당을 거칠게 공격했다. ‘포퓰리즘 파이터’였던 윤희숙 의원조차 대통령과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총선에서 낙선해 수도권 민심을 체험한 그는 “재정건전성을 어느정도 허물어서라도 한계에 몰린 이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게 지원하는 것이 지혜로운 포퓰리즘”이라고 했다. 누가 대통령의 눈과 귀를 막고 있는가.     ■  「 비선 정리하고 쓴소리 경청을 김건희 여사 문제 무겁게 다뤄야 이재명 대표 국정 운영 동반자로 불완전함 인정하고 달라져야 」    항간에는 윤 대통령이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탓을 한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윤 정부의 국정 성과를 알리지 않고 차기 대선을 염두에 둔 자기 장사만 한 것이 총선 패인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실상과는 차이가 있다. 김건희 여사 논란,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 도피 출국, 대파 875원 논란은 모두 용산발 대형 악재였다. 용산의 내부 혼선도 끝이 없다. 대국민 메시지 작성 과정에서 비서실장·정무수석·홍보수석 등 공식 라인이 배제됐다. 박영선 총리, 양정철 비서실장 카드를 흘린 것도 비선 실세들이었다. “대통령이 참모들과 회의해 결정한 뒤 관저에만 다녀오면 전혀 다른 말씀을 한다. 관저 정치를 없애는 것이 급선무다”는 말까지 나온다. 이러니 윤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율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최순실 국정 농단이 드러난 직후 지지율 25%보다도 낮은 23%로 추락한 것이다.   용산에서는 “직언하려면 직을 걸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온다. 사심없이 쓴소리를 한 원로나 친구는 연락이 끊어진다. 예스맨이 득세하고 용산 3적(賊), 6적, 8적 리스트가 떠돈다. 세종대왕 재위기에도 직언에는 용기가 필요했다. 오죽하면 세종이 “아직 과감한 말로 면전에서 쟁간하는 자나 중론을 반대해 논란하는 자가 없다”고 탄식했을까. 윤 대통령은 비선을 정리하고 참모들의 쓴소리를 권장하고 경청해야 한다. 야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야당(opposition party)은 정당정치에서 반대의견을 제도적으로 반영하기 위한 필수 장치다. 야당을 무시하면 민주주의를 하지 말자는 얘기다.   김건희 여사와 관련한 사안은 무겁게 다뤄야 한다.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명품백 수수 사건을 둘러싸고 용산과 검찰 수뇌부는 갈등하고 있다. 국민 다수도 야권이 추진하는 김건희 특검법에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데 반대한다. 대통령 부인이라고 적당히 덮고 넘어간다면 입시비리로 ‘멸문지화’를 당한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 일가 수사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헌법 11조 1항에 명시된 ‘법 앞의 평등’이라는 근대 문명국가의 대전제가 무너지게 된다.   윤 대통령은 마음을 비우고 몸을 낮춰야 한다. 정상회담의 화려한 의전과 환호에 가려졌던 서민의 고단한 일상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마지막 남은 한 사람의 중생을 구제하기 전까지는 지옥을 떠나지 않겠다는 지장보살의 연민이 발심(發心)할 것이다. 남루한 범부(凡夫)의 아픔을 당장 치유하지는 못하겠지만, 군중의 조롱을 받으며 십자가에 몸을 맡기는 예수의 심정으로 이들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 건축가들은 거대 신전(神殿)을 축조하면서 기둥을 직선이 아닌 곡선으로 만들었다. 안구의 망막이 곡면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태생적 시각의 왜곡까지 감안해 결과적으로 직선을 구현해 냈다. 데카르트는 세상이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확신을 갖지 못했다. 이런 지독한 분별의 힘으로 이성이 지배하는 근대의 새벽을 알린 철학자·수학자·과학자가 될 수 있었다. 권력은 타인을 나의 의지로 움직이는 일이다. 그래서 본질은 폭력이다. 대통령은 그 정점에 선 정치인이다. 막스 웨버가 말한 책임윤리를 다해 성공해야만 용서받는다. 그러기에 나의 불완전함을 메우기 위해 야당의 협조를 구하는 일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다.   미국과 소련은 파시즘에 맞서 제2차 세계대전을 끝장낸 양대 강국이었다.  두 동맹국이 불과 5년 만에 중국까지 끌어들여 ‘미니 3차 세계대전’의 비극을 만든 사나운 지정학의 공간인 한반도에 우리는 살고 있다. 핵을 가진 호전적인 북한과 중국·러시아는 그때처럼 밀착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서로를 향한 내부 총질을 중단하고 통합을 이뤄야 한다. 여소야대지만 야당을 파트너로 활용하면 수많은 문제가 풀릴 것이다. 비슷한 조건의 노태우 정부는 내치와 외교에 모두 성공했다. 정성을 다한 협치는 국민을 편안하게 만들고, 윤 대통령이 진정으로 강해지는 길이다.     이하경 대기자

    2024.04.22 00:36

  • [염재호 칼럼] 법조인 정치와 국가 어젠다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22대 총선의 주제는 비전이나 정책보다 상대를 정죄하기 위한 심판이었다. 총선의 주역은 모두 법조인들이었다. 대통령과 양당 대표 모두 법조인 출신이고, 조국혁신당 대표도 법대 교수 출신이다.   선거 결과 61명의 법조인이 당선되었다. 지난 21대 총선보다 15명이 늘어나 국회의석 20.3%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것도 전문성을 대표하는 비례대표가 아니라 지역구 의원만 55명이다. 이명박 정부 이후 7명의 총리 가운데 5명이 법대 출신이다. 양김 시대 이후 대통령이 되겠다고 도전한 사람들 대다수가 법대 출신이고 최근 정권 문재인, 윤석열 대통령 모두 법조인 출신이다.     ■  「 과잉 대표된 법조인 출신 국회의원 연역적 정답만 찾는 법조정치 우려 라이벌도 품는 포용의 리더십 절실 정쟁 멈추고 미래 어젠다 몰두해야 」    외국 의회의 경우를 보면 법조인 출신은 제한적이다. 영국은 2019년 총선에서 650명 의원 중 7.2%인 47명, 프랑스는 2022~27년 임기의 하원의원 577명 중 4.8%인 28명, 일본은 2021년 465명 중의원 중 3%인 14명에 불과하다. 미국도 2023년 하원의원 9.4%가 판검사 출신이라고 한다.   법조인은 다른 직업 출신보다 논리적으로 현상을 분석하고 법안 입안과 심의과정에서 전문성을 보인다. 법조인은 형식논리로 상대의 약점을 파고들어 굴복시키는 능력을 갖고 있다. 객관적 증거와 논리적 분석을 바탕으로 상대를 평가하고 판단하는 훈련을 오래 받아왔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영미법 전통과 달리 독일과 일본의 대륙법 전통을 갖고 있어 법체계가 연역적이다. 미국처럼 피고가 유죄를 인정하거나 검찰에게 유리한 증언을 통해 형을 낮추는 플리바게닝(plea bargaining)제도가 우리나라에는 없다. 정해진 법 규정에 따라 연역적 추론으로 피고의 죄를 판단하고 구체적 형량으로 심판하기 때문이다. 영미법은 판례 중심의 귀납적 체계이기에 절대적 판단보다는 상대적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미국에서 배심원제도가 발달한 이유도 판사의 절대적 판단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의 상대적 판단도 고려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필자도 학부가 법대 행정학과라서 수업이 마치 수학에서 정답을 찾듯 연역적 추론 교육을 배우는 법학 중심이었다. 하지만 대학원에서는 정치학의 분과로 행정학을 공부해서 대안 탐색의 귀납적 방식을 익혀야 했다. 스탠퍼드 대학원 시절 은사였던 제임스 마치(James March) 교수는 정책 결정을 ‘정답 찾기’가 아니라 ‘통나무 굴리기(log rolling)’로 비유했다. 여러 명이 통나무를 굴려 움직일 때 모두 적절하게 힘을 배분하여 이동시켜야지, 한두 명이 조급하게 밀면 통나무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법조인 정치가들은 마치 형량을 정하듯 R&D 예산 30% 삭감, 의대 2000명 증원 등 모든 이슈에서 정답을 제시하곤 한다. 또는 자신의 잘못을 형식논리로 호도하여 남의 탓과 팬덤 현상으로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곤 한다. 좌우 모두 독선적 정치로 국민을 피폐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들이 국가 어젠다를 왜곡할 때 우리에게 닥친 국가적 위기는 심각하다. 인공지능 혁명의 혼돈 속에서 미·중 갈등을 위시한 국제질서의 재편, 북한 핵미사일 위협, 글로벌 밸류체인 변화, 수명연장과 저출생, 인공지능이 몰고 올 직업·노동·교육 등의 전방위적 사회 패러다임 변화는 지각변동 수준이 될 것이다.   우리 정치 지도자들에게는 이런 격랑이 보이지 않는지? 우리 모두가 힘들게 이뤄낸 고도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성취를 더 발전시킬 생각은 하지 않고 적폐 청산, 일제 잔재 청산, 좌파 카르텔 청산, 검찰 독재 심판 등 과거 시시비비만을 따지는 싸움만이 그들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는지?   퓰리처상 작가인 도리스 컨스 굿윈(Doris Kearns Goodwin)의 『권력의 조건』을 보면 자신의 정적이었던 라이벌까지 끌어안은 링컨의 포용 리더십을 잘 그리고 있다. 독학으로 변호사가 된 링컨은 대선 경선과정에서 경쟁한 라이벌들을 국무장관, 재무장관, 법무장관에 임명했고, 야당인 민주당 출신 세 사람도 장관으로 임명했다. 막강한 경쟁자들도 처음에는 링컨을 경험도 없고 무식하다고 멸시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존경심과 함께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라는 평을 하게 되었다. 남북전쟁과 노예해방 등 중대한 국가 어젠다를 풀기 위해서는 모두 힘을 합쳐야 한다는 링컨의 뛰어난 정치 리더십이 돋보인다.   이제 국가 지도자가 되겠다고 나서는 정치인들은 미래의 국가 어젠다를 우선적으로 이야기해야 한다. 더 이상 민변 출신들과 검찰 출신들처럼 법조인들이 중심이 되어 벌이는 복수의 대혈투극에 국민을 끌어들이지 말기 바란다. 혼돈과 변화의 시대에는 정죄하고 심판하는 판단의 리더십보다 국가 미래 어젠다에 대해 상대를 설득하고 합의를 끌어내는 포용의 리더십이 절실하다. 이제라도 대통령이 국가 미래 어젠다를 최우선 통치 과제로 삼아 정쟁 종식을 선언하고 함께 지혜를 모으는 포용의 리더십을 펼치길 기대한다.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2024.04.17 00:36

  • [최훈 칼럼] 분노와 심판은 또 다른 기대다

    최훈 주필 투표에 나선 2966만2313명만큼의 각기 다른 심경과 판단이 있었을 터다. 그 시점 거기 존재했던 정치의 객관적 실체야 물론 하나다. 그러나 각자의 렌즈로 판단한 다수 민심은 정권 심판이었다. 선택의 여지 없는 소선거구제, 3번부터 시작한 왜곡된 위성정당 제도를 탓할 것도 없다. 선수들 스스로 합의한 룰이었으니. 각각 몇십 초의 날인들이 모여 심판으로 분출되기까지 2년여 기억의 축적이 있었다.   윤석열 정권의 탄생은 문재인 정부의 진영 편가르기에 대한 실망에서였다. ‘공정’ ‘정의’ ‘균형’ ‘통합’ ‘소통’ ‘협치’의 가치를 이뤄내 주길 고대했다. 그러나 기대는 서서히 의문에서 실망을 거쳐 좌절로 이어져 왔다. ‘아빠 찬스’ 의혹의 보건복지장관 강행, 특수부 검사 중심의 편향 인사 논란부터였다. 야당과의 대화 기피, 말 잘 듣는 여당 만들기는 포용과 민주적 리더십에 의문을 낳았다. 해병대 채 상병 사망 수사와 디올백 사건의 처리는 ‘공정’ ‘정의’의 기대를 사그러들게 했다. 으뜸의 오류는 국민 소통의 단절이다. 질문 외면과 일방 소통은 국민과 대통령 중 누가 나라의 주인인지 좌절을 안겨 주고 말았다. 다수 지지를 받는 의대 증원 역시 진정한 대화와 설득의 이슈 관리 부족에 “독선”의 역풍에 직면해 있다.     ■  「 2년여 용산의 불통·독선적 태도에 누적돼온 실망·좌절·무력감이 분출   상대의 변화를 지켜보는 게 분노 용산·여야 모두 협치로 응답하길  」    세 차례쯤의 기회야 세상 모두에게 주어진다. 지난해 10월 강서구청장 선거 참패가 첫 번째였다. 그러나 “구청장 선거 하나 갖고 무슨 심판이냐”며 혁신의 시간을 허송했다. 이재명 민주당의 친명 공천 후유증 속 대통령 지지도가 39%(한국갤럽)를 찍었던 3월 초중반은 두 번째 찬스였다. 3월 6일에 이종섭 호주대사 논란, 14일엔 황상무 수석의 ‘횟칼 테러’ 발언이 돌출했다. 그 시점 의대 증원 문제를 유연하게 풀어낼 결단과 함께, 신속히 이 대사·황 수석 문제를 수습해 민심을 다독여야 했다. 총선 아흐레 전. 의대 증원 대국민 담화는 화난 민심에 기름을 붓고 말았다. 해결의 물꼬를 기대했다가 51분의 인내심 실험을 당한 허탈함에 선거는 거기까지였다. “역시 그 태도는 변하지 않는다”는 좌절·분노가 굳어졌다. 2년여 굳어져 온 용산의 자기 집착, 편향의 관성이었다.   대통령실의 한계가 노출된 건 오래다. 총선을 치른 시점의 실장·수석급 이상 중 자신이 선거를 치러 본 이란 한 명도 없었다. 늘 고시 출신 관료·검사들 이 주인이었다. 시험 권력으로 삶을 시작, 윗 분 기호에 맞을 페이퍼 워크로 살아온 이들이 다수다. 가장 수직적인 검찰 문화에서 지내 온 보스 밑에 역시 톱 다운 마인드 관료들의 조합이다. 현장을 느낄 수도, 그럴 필요도, 느껴 달라는 기대도 힘든 구조다. 내각·비서실 어느 곳에도 민심을 수렴하며 정치를 조율해 갈 지혜로운 스핀 닥터가 보이지 않았다. “우리 판단은 늘 우월하다”는 엘리트·특권 편향과 집착이 거리의 정서·상식과 동떨어지니 예측조차 안 되는 판단들이 이어져 왔다. 159명 희생된 이태원의 충격에도 “법조문상 귀책이 없지 않느냐”며 정무적 책임이 사라진 게 용산의 문화였다.   분노는 상대에의 기대와 요구가 꺾일 때 생긴다. 실망, 억울함, 좌절과 상실, 우울, 두려움이 얽힌다. 그 복잡한 감정들이 병목 현상에 이른 마지막 단계는 무력감이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주저앉을 가장 위험한 상태다. 그러면서 “너도 한번 나의 무력감을 느껴보라”는 심리가 발동한다. 모든 도덕과 정의의 황금률은 “그러므로 남이 너에게 대접해 주길 원하는 대로 너도 남에게 그렇게 대접하라”는 ‘호혜’와 ‘상호 존중’ 아닌가. 투표만이 무력감 속에 분노를 분출할 유일한 출구였다. “권력이 아니라 내가 주인”이란 걸 똑똑히 보여주자는 게 바로 이번 총선의 정신이다.   분노와 심판은 또 다른 기대다. 공동체의 생존에 필연적인 정서와 욕구다. “더 이상 그리 가면 모두 위태로운 파국”이라는 경고다. “인간에 두려움과 분노가 없었다면 벌써 멸종했을 것”이듯, 오히려 인간 관계나 사회를 더 건강하게 만들 수있을 전기다. 분노 안엔 그러니 상대에의 관심과 사랑도 존재한다. 어느 쪽에도 투표 안 한 유권자 3분의 1(1400만 명)이 그들 여야엔 훨씬 두려운 무관심이다. 반드시 분노와 심판에 뒤따라오는 특성이 있다. “당신이 내 뜻을 주목해 달라” “나는 너를 계속 지켜볼 거야”다. 상대의 변화를 유심히 지켜보려는 본능이다.   총선의 총 득표 차이는 5.4%(민주 50.5%, 국민의힘 45.1%)뿐이다. 투표율 67%이니 어느 쪽도 유권자 과반엔 턱없는 지지다. 대통령실과 여야 모두 “왜 내게 분노했을까”를 곱씹으며 영혼이 달라져야 할 이유다. 무엇보다 나라가 힘들지 않은가. 민생·경제, 미 대선, 어제 이란까지 가세한 전쟁 등의 국제 정세, 북한 등 어느 하나 편안치가 않다. 국정 기조 쇄신은 윤석열 정부엔 마지막으로 주어질 세 번째 기회다. 그만들 싸우고 협력해 국민 좀 편안하게 해달라는 게 심판의 기대다. 그대들의 권력이란 덧없이 짧다. 영원한 분노와 심판의 힘 지닌 전지전능은 단 하나, 국민뿐이다.     최훈 주필

    2024.04.15 00:38

  • [이하경 칼럼] 옳은 개혁도 반드시 성공하지는 않는다

    이하경 대기자 김영삼 정부는 1995년 사법개혁에 시동을 걸었다. 서울대 법대 교수 출신인 박세일 청와대 정책수석이 주도했다. 세계 최저 수준인 국민 1인당 변호사 수를 획기적으로 늘리고 로스쿨을 도입한다는 소문이 났다. 대법원이 협상을 제안했고, 사법개혁위원회가 만들어졌다. 법원·검찰·변호사 대표와 청와대 인사들이 참여했다. 개혁의 주체와 대상이 머리를 맡대고 숙의했다. 연간 300명인 변호사 배출 숫자를 96년 500명, 97년 600명 등 단계적으로 늘려 2000년 이후에는 1000~2000명으로 확대하는 데 합의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도 합의는 지켜졌고, 이명박 정부 때인 2009년 로스쿨이 문을 열었다. 매년 1700여 명의 변호사가 배출되고 있다.     ■  「 의대 증원 맞지만 2000명은 무리 세종·영조도 경청…현실 반영해 이승만·박정희 통합 토대로 추진 김영삼 사법개혁도 단계적 접근 」    의대 정원을 확대하겠다는 윤석열 정부 의료개혁에 대한 국민의 지지는 압도적이다. 그러나 의사들은 집단 파업 중이고, 국민들은 불안해하고 있다. 김영삼 정부 때 법원행정처에 근무하면서 청와대와 소통했던 원로 법조인의 의견을 들었다. “이렇게 선전포고식으로 밀어붙일 게 아니라 의료계와 충분한 대화를 나눠야 한다. 2035년에 1만 명의 의사가 부족하지만 최종 의사결정권자인 대통령이 5년간 매년 2000명 증원 카드를 던진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어떤 전문가도 2000명 카드를 제시한 적이 없다. 정부안의 근거가 됐다는 보고서를 제출한 3개 기관의 당사자들은 연간 750명에서 1000명 정도를 늘리면서 연착륙시키자고 한다. 의료개혁이 처음에는 지지율을 확 끌어올렸지만 지금은 총선 감점 요인이 돼버렸다.   의사 정원을 늘리는 의료개혁은 백번·천번 옳은 정책이다. 의사가 환자를 떠나고, 정원을 줄이자는 건 상식이하다. 그러나 개혁은 나의 방향이 옳다고 해서 반드시 성공하지는 않는다. 더구나 한국의 의사집단은 전투력이 강하지 않은가. 2000년 김대중 정부 때 의약분업 과정에서 의대 정원을 351명 줄였고, 2020년 문재인 정부 때는 의사국가고시를 거부하면서 400명 증원 카드를 무산시켰다. 법률가들이 포진한 윤 정부는 “법대로 하자”고 나온다. 그러나 미국의 법 사상가 홈스 전 연방 대법관은 “법의 생명은 논리가 아니라 경험”이라고 했다. 세심한 소통과 공감의 과정이 필요했다. 윤 정부는 경직됐고, 서둘렀다.   조선의 성공한 전제군주들도 이렇게 거칠지는 않았다. 1428년 세제개혁에 착수한 세종은 전답 1결당 10말을 정액 징수하는 균등부과 제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바로 시행하지 않았다. 백성 17만 명의 의견을 물었다. 땅이 기름지고 소출이 많은 경상·전라도 농민은 압도적으로 찬성했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반대가 더 많았다. 세종은 시행을 유보했다. 격렬한 찬반 토론과 시범 실시를 거쳐 전면 실시된 것은 성종 때인 1489년이었다. 개혁 착수 61년 만이었다.   17세기에 소빙하기가 전 세계를 강타해 유럽에서는 대역병과 마녀사냥이 극성을 부렸다. 중국 대기근은 농민 반란을 촉발해 명청 교체가 이뤄졌다. 조선에서는 경신(庚辛)대기근이 닥쳐 부모가 자식을 잡아먹고 시체가 거리를 메웠다. 민생이 초토화된 뒤 등장한 군주가 영조다. 천한 무수리의 몸에서 태어나 사가(私家)에서 청년기를 보낸 영조는 서민의 참상을 알았다. 죽은 사람에게 부과하는 백골징포(白骨徵布), 젖먹이에게 물리는 황구첨정(黃口簽丁)에 시달리던 백성을 위해 군역을 절반으로 줄여 주는 균역법을 시행했다. 창경궁 홍화문에서 백성들의 애소(哀訴)를 들었기에 가능했다. 현실에 바탕을 둔 세제 개혁으로 조선은 임란(壬亂), 호란(胡亂)과 대기근의 후유증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농지개혁도 공산주의자였던 조봉암을 과감하게 농림부 장관으로 발탁하고, 대지주인 한민당 지도자 김성수의 자기희생적 협조를 얻었기에 성공했다. 내부 통합에서 출발해 전 국민을 지주로 만든 농지개혁은 대한민국 최초의 경제민주화 조치였다. 한국전쟁 때 적화되지 않고 훗날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낸 원동력이었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훗날 비판자가 되는 장준하가 발행한 『사상계』 지식인 그룹의 경제개혁 제안에 주목했다. 계획경제, 공업 중심의 불균형 성장론, 기간산업 집중 육성, 미국 이외 국가로의 원조 다각화, 저축 강행과 소비절약, 수출 확대는 군정의 정책에 모두 반영됐다. 사상계는 교착된 한·일 문제 해결을 촉구하며 새 정부가 직면할 현실을 측면에서 도와줬다. 함석헌은 5·16을 “신속히 이뤄져야 할 복부 수술”이라고 했다(『만주 모던』 한석정).   윤 대통령이 달라져야 한다. 국민의힘 수도권 후보들의 제안대로 의대 정원까지 테이블에 올려놓고 협의해야 한다. 총선이 끝나면 결과와 무관하게 예스맨들을 모두 내보내고 “노”라고 직언할 수 있는 인물로 새 진용을 짜야 한다. 아무리 미워도 야당과 대화하고 통합의 정치를 해야 한다. 그래야 남은 임기 3년 동안 옳으면서도 성공한 개혁을 이뤄낼 수 있다.     이하경 대기자

    2024.04.01 01:03

  • [고현곤 칼럼] 의정 충돌에서 드러난 대한민국의 민낯

    고현곤 편집인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서울대병원은 아비규환이었다. 북한군이 남침 나흘 만인 6월 28일, 병원 앞까지 닥쳤다. 의료진은 부상자를 두고 떠날 수 없었다. 치료를 계속했다. 얼마 안 가 북한군이 국군 저지선을 뚫고 병원에 난입했다. 부상자와 의료진에게 닥치는 대로 총을 쐈다. 9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의료진은 끌려갔다. 공개 처형을 당하기도 했다. 6·25 서울대 의대 학살사건이다. 추모비가 서울대병원에 있다.     ■  「 응급실 비운 의사 비난받아 마땅 디테일 없이 우격다짐, 정부도 문제 이념보다 뿌리 깊은 계층갈등 노출     애꿎은 국민만 각자도생 내몰려 」    이유야 어떻든 이번 의정 충돌에서 전공의가 응급실·중환자실·수술실을 떠난 건 유감이다. 선배들이 목숨을 걸고 지킨 곳을 너무 쉽게 포기했다. 환자를 등지는 모진 행태에 국민은 놀라고 실망했다. 환자를 내 가족이라고 여겼으면 그랬겠나. 중증·응급환자만이라도 번갈아 지켰으면 더 많은 응원을 받았을 텐데 아쉽다. 환자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지난주 방재승 전국 의대교수 비대위원장이 “국민 없이는 의사도 없다는 걸 잊었다”고 말했다. 사과가 너무 늦었다.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국민과 의사 사이에 쌓인 상처와 불신은 오래 남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일부의 발언은 도를 넘었다. 환자 곁에 남은 전공의를 조롱했다. “평생 박제해야 한다”는 식의 위협을 서슴지 않았다. 노환규 전 대한의사협회 회장은 “의사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어리석은 발상”이라고 말했다. 우월감과 특권의식이 묻어나는 부적절한 발언이다. ‘겸손한 자가 강한 자’라는 진리를 모르는 모양이다. “이런 나라에 살기 싫어 용접을 배우고 있다” “포도 농사를 짓겠다” 같은 말이 쏟아졌다. 의사가 용접이나 포도 농사를 못 할 이유는 없다. 그렇다고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만만한 일은 아니다. 당장 대한용접협회는 “의사들이 용접을 우습게 생각하는 듯하다”고 유감을 표했다.   이번 사태는 우리 사회의 치부인 계층·빈부 갈등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이념·지역·세대 갈등보다 뿌리 깊다. 중산층이 무너지면서 더 심해졌다. 요새 사석에서 균형감을 잃고 과하게 의사 편을 드는 사람이 눈에 띈다. 한 대기업의 최고경영자는 “전공의가 혹사당한다. 차라리 잘됐다. 엎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1년쯤 놀면 어떻냐”고 말했다. 평소답지 않게 흥분해 의아했다. 환자 걱정은 관심 밖이었다. 다 이유가 있었다. 딸이 레지던트 2년 차였다. 개개인의 사정에 따라 온 나라가 이기심의 수렁에 빠졌다.   심각성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부의 일 처리는 서툴고 거칠다. 전략도, 홍보도 부족하다. 의대 증원은 오랜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사안이다. 어떻게 풀지 정부의 구체적이고 정교한 계획이 있어야 한다. 2000명 증원의 근거가 무엇인지, 실제로 현장에서 몇 명이나 더 가르칠 여력이 있는지, 뒤죽박죽 의료 수가는 어떻게 개선할지, 격무인 전공의의 노동인권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지….   정부가 디테일을 건너뛰고 덜컥 2000명 증원을 강행하는 바람에 반발이 커졌다. 너무 만만하게 봤거나, 무리하게 밀어붙였거나. 4대 필수의료 패키지는 증원 발표 불과 닷새 전에 나왔다. 좀 더 일찍 마련해 시간을 갖고 의료계를 설득하는 과정을 거쳤어야 했다. 다급해진 정부가 이달에 전공의 처우개선 토론회를 잇따라 열었다. 그동안 뭐하다 이제 와서? 일의 순서가 바뀐 것이다.   증원 규모도 복수 안을 놓고 그 흔한 공청회라도 열었으면 좀 낫지 않았을까. 쉬쉬하다 군사 작전하듯 전격 발표했다. 단숨에 대학별 배정까지 마친 건 이해할 수 없다. 이게 나라를 뒤집어 놓을 일인가. 처음에 정부는 지지율 상승에 내심 고무됐던 것 같다. 생각이 짧다. 환자가 불편해지면 정부가 욕을 먹게 돼 있다. 지지율이 꺾이고 사태가 심상치 않자 부랴부랴 유화 제스처를 보냈다. 정부의 실력이 딱 이 정도 아닌가 싶다.   윤석열 대통령은 올해 신년사에서 “노동·교육·연금 3대 구조개혁을 흔들림 없이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신년사 때도 비슷한 말을 했다. 2022년 대선 공약이었다. 정권 전반부, 개혁의 골든타임이 다 가도록 손도 못 댔다. 지난해 뜬금없이 “이념이 제일 중요하다”며 전선을 넓혔고, 국운이 걸린 듯 엑스포에 매달렸다. 잇따른 구설을 수습하느라 아까운 시간을 허비했다. 의사 증원 하나 매끄럽게 못 풀면서 전 국민을 상대로 한 3대 개혁은 언감생심이다. 총선이 끝나면 새 권력을 향해 불나방처럼 이합집산이 벌어질 게 틀림없다. 정권의 힘은 갈수록 떨어진다. 국정관리 능력이 부족하고, 힘마저 빠진다면 무슨 수로 3대 개혁을 할 수 있겠나.   이번 사태는 의사도 잘못했고, 정부도 잘못했다. 양비론이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국민을 불안하게 한 것만으로도 양측 모두 할 말이 없게 됐다. 사과부터 해야 한다. 의정 충돌을 중재할 만한존경받는 어른도, 정치인도 안 보인다. 섣불리 나섰다가 망신만 당할 분위기다. 그러는 사이 국민은 이 병원, 저 병원 전전하며 각자도생의 정글로 내몰렸다. 의지할 곳이 없다. 나라가 어수선하다. 고현곤 편집인

    2024.03.26 00:41

  • [최훈 칼럼] ‘용산 리스크’의 재구성

    최훈 주필 모든 정치의 정답은 꿈틀거리는 민심의 현장이다. 이종섭 호주 대사 거취 논란이나 황상무 수석의 ‘횟칼 테러’ 발언 여파로 총선은 다시 출렁거리고 있다. 황 수석 사퇴와 이 대사 귀국으로 임시 봉합한 국면이지만 싸늘한 여론과 수도권 지지도 폭락에 놀라 수용한 터라 효과조차 미미한 듯하다. 여당은 애써 잠재웠던 ‘윤석열-한동훈’ 갈등이 되살아나면서 총선이 다시 ‘윤석열 대 야당’의 정권 심판 구도로 바뀌는 악재에 초긴장이다.     ■  「 민심 둔감 이종섭·황상무 사태로 오만 프레임 갇히고 만 대통령실 ‘엘리트’ 내부논리 과잉편향 접고 현장 민심 존중하는 공감 노력을 」    수도권(서울 3, 경기 2)에서 영끌하며 뛰고 있는 국민의힘 후보 5인에게 ‘용산 리스크’가 낳은 현장을 들어보았다. “다녀보면 ‘매일 친명횡재다 뭐다 이재명 욕은 다 하면서 자기들은 왜 이리 마음대로 하나’란 얘기다. ‘어린 해병이 죽었는데 책임은커녕 대사로 내보내 놓고 도대체 국민 알기를 뭘로 아느냐’란다. ‘지금도 이리하는데 국회까지 쥐여주면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이겠느냐’고 한다. 용산이 오만의 프레임에 갇혔다. 3%, 1천 표 차 생사라 끼니 거르고 돌아다니는 데 한 주 새 수도권 지지 15%가 빠지니 맥만 빠질 뿐이다.”(경기 A후보)   “보수층의 용산 원망이 더 많더라. ‘4년 동안 야당에 발목 잡혀 생고생을 했는데 다시 지려고 작정했느냐’며 화를 낸다. ‘왜 하필 이때 굳이 이거냐’란 절박감의 분노다. 정치 관심이 많을수록 이종섭 대사에 부정적이더라. ‘피의자인 양반을 갑자기 대사로 내보내니 뭔가 켕기는 게 있어서 침묵하라 꼬리 자른 것 아니냐’고들 한다. ‘아 이게 뭔가 있구나’라는 의심이 퍼지는 건 순간이다. 공수처 문제점 얘기해 봤자 먹고살기 바쁜 이들이야 임명한 대통령실 잘못이라 생각할 수밖엔 없지 않냐. 살판난 민주당의 빅 마우스에 막기조차 버겁다.”(서울 B후보)   “가장 걱정은 이재명 사천 파동에 가라앉던 정권심판론이 되살아난 분위기다. 민주당이 다시 으쌰으쌰다. 정권심판론 도지니 여기저기 민주당과 진보당이 후보 단일화를 한다. 선거가 기세, 바람 아닌가. 용산이 매사 독선적으로만 각인되니 과거 조국 수사도 무리 아니냐는 의심으로 뒤바뀐다. 조국당 지지율 좀 보라. 비례 조국당 찍으러 집 나선 이들이 지역구의 여당 찍을 리도 없지 않냐”(서울 C후보)   “중도층은 윤석열-한동훈 갈등에 민감하더라. 남의 말 잘 안 듣는다는 윤 대통령에게, 한 위원장이 바른말 좀 하고, 그걸 대통령이 들어주는 모양새면 ‘아 이 당은 그래도 기대는 해볼 만하네’라는 이들이 중도층이다. 중도층이 가름할 총선 보름 앞에 이 모양이니…. 며칠 전 대통령이 농협의 ‘875원 대파 한 단’ 들고 “이 가격이 합리적”이라 한 것도 말이 많더라. 왜 자꾸 시빗거리 만드는 건지. 그냥 좀 가만히 계셔줬으면 ….”(경기 D후보) “이거 의료 대란 기류도 묘해진다. 자꾸 불통 용산 이미지이다 보니 2000명 증원도 일방적 밀어붙이기 아니냐는 심리적 요동이 느껴진다. 어제 한 위원장이 의사들 만났다지만 환자들만 피해인 대란이 이어지면 다 나라님 탓일까 봐 걱정이다.”(서울 E후보)   총선의 승패 떠나 3년 넘게 국정을 더 이끌어 가야 할 용산이다. 수도권의 아우성 직전 이종섭 사태에의 대통령실 입장은 이랬다. “공수처·민주당, 일부 친야 언론이 결탁해 덫 놓은 정치 공작.” 황상무 파문 때는 “사람 그렇게 쓰는 것 아니고, 리더십 원칙이 더 중요” “언론 자유가 우리 정부 국정 철학일 뿐”이라며 6일을 끌었다. 내부의 지체된 판단은 결국 현장에 최악의 나비효과를 몰고 왔다. 바로 용산의 민심 공감(共感)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공감이란 “다른 사람 처지에 서보고, 그들의 느낌·시각을 이해하며, 그렇게 이해한 통찰을 자신의 행동 지침으로 삼는” 상태다. 용산의 최대 오류는 바로 자기 내부 논리에 대한 선택적 과잉 공감이다. “공감이란 마일리지 같은 것”(과학철학자 장대익)이어서 자신에게만 쓰면 다른 이들에겐 쓸 수가 없다. 내 편에만 쓰면 다른 편에겐 해악이 될 위험이 공감의 양면성이다.   그러니 용산의 내부 소통이 늘 의문이다. 윤 대통령의 격노가 다반사라더라도, 먼저 현장을 느끼며 “노”하는 참모들이 버텨야 하는 것 아닌가. 그게 엘리트 집단이라 자부할 용산의 국가적 책무다. 도대체 안보실의 누가 이 대사를 밀어붙였나. 누가 황 수석 사퇴를 그리 끌어갔는가. “성공에는 100명의 부모가 있지만 실패는 고아”이듯 일 터지면 그 뒤로 숨기 바빠 대통령만 홀로 전면에 서 있는 게 용산의 기억이다.   최고의 비서실장이던 레이건 대통령의 제임스 베이커는 “나쁜 결과를 막을 사전 노력이 핵심이며, 이를 위해 비서실장은 늘 ‘노 맨(No Man)’이자 게이트 키퍼여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소중한 통찰을 그는 레이건 장례식 추모사에 남겼다. “그 누가 자신의 라이벌 선거참모를 두 차례나 했던 이를 자기 비서실장에 임명하겠는가. 늘 너그러이 (‘노 맨’을) 받아주던 그를 위해 나는 8년 매일매일을 노력할 수 있었다.” 맞다. 먼저 대통령이 달라지길 바란다.     최훈 주필

    2024.03.25 00:50

  • [염재호 칼럼] 누가 유권자인가?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22대 국회의원선거의 사전투표까지 20여 일도 채 남지 않았다. 다음 주말부터 선거운동이 본격화되면 지하철역마다 허리를 굽혀 표를 구걸하는 후보들의 모습을 열흘 정도는 지켜봐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투표권을 가진 사람을 유권자라고 한다. 하지만 일반 국민은 정치에서 진정 무슨 권한을 가진 것일까?   유권자인 국민은 총선이 끝나면 국회의 이전투구를 바라보며 맥없이 정치혐오에 빠지게 된다. 역대 최악의 국회라고 평가받는 21대 국회보다 22대 국회가 더 나을 것 같지도 않다. 양대 정당은 시스템 공천이라고 하지만, 국가를 위해 봉사할 유능한 인물들을 유권자인 국민에게 공천한 것인지 의문이다. 게다가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위성정당제로 어처구니없이 탈바꿈해 유권자를 농락하는 비상식적 제도로 전락했다.     ■  「 입법권 남용과 과잉특권 빈축 국회 정당 후보 공천 시스템도 비합리적 국회의원 소명의식과 정치력 절실 AI 활용한 후보 검증 시스템 갖춰야 」    국회의원 후보들은 본 선거보다 정당 공천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후보 개인의 능력이나 비전보다 정당 중심 투표 경향 때문이다. 하지만 공천과정에서 국민 참여를 보장한다는 여론조사는 왜곡되기 쉽고 극렬 지지당원들의 영향력은 압도적이다. 형식은 시스템 공천이지만, 실질은 당 대표나 지도부의 뜻에 좌우되어 사천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민주화 이후 국정운영에서 국회의 영향력은 점점 비대해지고 있다. 17대 국회에서 정부의 입법발의는 1102건, 의원발의는 5728건이던 것이 점점 늘어나 21대 국회에서 정부발의는 831건으로 축소되고 의원발의는 2만3584건으로 증가했다. 국회의원들은 자신들이 국정을 책임지는 헌법기관이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자신들만이 선출된 권력이라고 행정부 공무원들을 폄하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예산심의 과정에서 쪽지예산으로 지역구 챙기기에 급급하고, 예산안이 통과되면 플래카드를 내걸고 자신이 따온 지역구 예산 자랑에 여념이 없다. 지역의원인지 국정을 담당한 국회의원인지 모를 정도다.   국회의원은 임기 동안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다.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이끌던 장기표 특권폐지국민운동본부 상임대표는 국회의원 특권을 없애야 바른 정치가 가능해진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의 특권은 180여 개나 되고 연봉은 세계에서 네 번째로 많은 1억5500만원인데, 우리나라 정치인 신뢰도는 167개국 중 114위라고 한다. 우리 국회의원 보좌관은 6명인 반면에 스웨덴은 보좌관 한 명을 국회의원 두 명이 공유하고, 출퇴근에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봉급은 국민 전체 근로자 평균임금만 받는다고 한다.   막스 베버가 강의를 책으로 엮은 『직업으로서 정치』는 정치가의 역할을 잘 알려주는 불후의 명작이다. 영어에서 직업(vocation)은 하늘로부터 부름 받은 소명이나 사명감을 뜻한다. 단순히 일의 대가로 보수를 받는 직업의 의미를 넘어선다는 것이다. 그래서 원로 정치학자 최장집 교수는 막스 베버 정치철학을 강의하고 책으로 펴낼 때 직업 대신 『소명으로서의 정치』라고 제목을 정했다.   베버는 정치가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세 가지 자질이 열정, 책임감, 그리고 균형적 판단이라고 했다. 단지 열정만으로는 정치가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고 냉철한 균형적 판단이 중요하다. 정치가가 냉철한 균형적 판단을 갖기 위해서는 ‘신념의 윤리’보다 ‘책임의 윤리’를 고민해야 한다. 도덕적 근본주의와 같은 신념의 윤리만 갖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척결해야 한다는 오류에서 벗어나야 한다. 정치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미래의 문제를 설득과 합의를 통해 풀어나가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정치가는 국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봉사하는 소명감으로 일해야 한다. 정치를 월급 받고 특권 누리는 직업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 금품을 받거나 공천을 얻기 위해 아첨, 거짓말, 막말을 일삼지 않아야 한다. 자신에게 불리해도 바른말을 하고 국가의 미래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이번 공천 과정에서도 과거 발언 문제나 금품수수 증거로 공천이 취소되는 사례가 나왔다. 이제 인공지능(AI)의 도입으로 국회의원 후보 자질을 철저하게 평가하는 시스템 구축이 가능하다. 대체 불가능한 토큰(NFT) 방식을 활용하여 과거 모든 언행을 낱낱이 분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학회, 정당학회, 정책학회 등 전문가 단체들이 나서서 정당과 정치인에 대한 철저한 평가 시스템을 만들어 유권자들이 정치인들을 제대로 식별할 수 있는 권리를 되찾게 해주어야 한다.   유권자는 후보의 정치적 식견과 품격을 판단할 수 있는 정보를 가질 권리가 있다. AI 시대를 맞아 이제부터는 막말과 거짓 선동, 국회 질의 내용과 수준, 국가 미래를 위한 정책대안 제시, 지역구를 넘어선 국정 관련 활동, 정치적 설득과 통합 능력, 품격 있는 언행 등을 전문가 집단이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시스템을 마련해서 그 결과를 공개해야 한다. 그래야만 유권자가 선거에서 후보와 정당에 대해 준엄한 심판을 할 수 있는 진정한 권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2024.03.19 00:42

  • [장훈 칼럼] 차라리 AI 후보에게 투표하고 싶다

    장훈 중앙대 명예교수·본사 칼럼니스트 비관적 반응들이 먼저 제기될 수 있다. 인공지능(AI)은 언젠가 인간 자율성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 아닌가? AI가 정치에 도입되면, 민주정치보다는 감시와 통제에 쓰이지 않을까? 다른 한편으로는 갑갑한 정치 현실로부터 탈출을 꿈꾸는, 헛헛한 공상으로 읽힐 수도 있겠다.   여러 우려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4월 총선을 앞두고 AI 정치인의 가능성을 논해보려는 데에는 절박한 이유가 있다. 첫째, 선거철 한국의 정당은 까마득한 절벽으로 추락하고 있다. 권력 다툼을 위해서라면 온갖 반칙, 위법, 떼법을 총동원하는 아수라장이 매일 매일 펼쳐지고 있다. 무언가 파괴적 혁신 없이는 정치의 타락은 스스로 멈추지 않을 것이다. 둘째, 챗GPT4, 소라, 코파일럿 등이 보여주듯 AI의 발전은 근대 산업혁명 이후 최대의 삶 변화로 이어지고 있다. 일자리, 돌봄, 여가, 전쟁 등 모든 분야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오는 중이다.     ■  「 선거철 정당의 타락이 도를 넘어 기성 정치에 파괴적 혁신이 필요 무감정 AI로 분노의 정치를 제어 AI로 반헌법과 반칙 걸러냈으면 」    그런데 우리에게 익숙한 현대의 선거-정당정치가 18~19세기 산업혁명 시기에 등장한 근대적 개인들의 건축물이라는 점을 돌아본다면, AI 혁명이 불러오는 인간 존재의 재설정은 결국 선거-정당정치의 본질적 변화로 이어지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울 수 있다. 18세기 부르주아들이 열었던 ‘그들만의 민주주의’가 200여 년 만에 ‘모든 사람의 민주주의’로 진화했듯이, AI 혁명이 민주주의를 상상 너머의 세계로 끌어올릴 가능성도 꿈꾸어 볼 만하다.   #1. 이미 숱하게 지적되었지만, 4월 총선을 앞두고 벌어지는 우리 정당들의 자멸적 행태부터 간단히 돌아보자. 다양한 비판들이 제기되고 있지만, 필자는 우리 정당정치의 타락을 주도하는 것은 정당을 장악한 포퓰리스트들과 이들을 열성적으로 뒷받침하는 정치 훌리건들이라고 본다.   포퓰리스트들은 여러 얼굴을 갖고 있지만, 공통적인 특성은 민주정치의 제도와 절차, 법치를 한없이 가볍게 여긴다는 점이다. 사례는 차고 넘친다. 2024년 총선 지역구 획정의 법정 기한은 2023년 3월이었다. 다수당인 민주당은 2024년에 들어서야 마침내 준연동형 선거구제를 유지하기로 결정하였고 여야 정당들은 그제야 지역구 획정을 마무리 짓게 되었다. 누더기가 된 공천 과정, 여야 정당들의 위성정당 급조, 선거 이후 이들의 예정된 원대복귀 등은 제도와 절차가 이미 파산 지경임을 보여준다.   문제는 이러한 추락을 멈출 주도 세력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민들은 파당적 훌리건으로 빠져들거나 무심한 방관자, 냉담자의 길을 선택하고 있다. 결국 관습적 사고를 넘어서는 혁신, 파괴적 혁신만이 추락을 멈출 수 있다.   #2. 산업혁명에 먼저 성공하고 근대 민주주의의 외양을 갖추기 시작하던 18세기 영국인들에게 보통선거권은 꿈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AI 정치인,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유권자와 의사소통, 정책 결정 과정 등에 데이터 처리와 연산 결과를 활용하는 AI와 인간 정치인이 결합한 AI-휴먼 정치인의 등장은 신기루처럼 들릴 수 있다.   허황한 얘기처럼 들리겠지만, 혁신 국가들은 이미 AI 정치실험에 나서고 있다. 뉴질랜드는 2022년 최초의 인공지능 정치인 SAM을 공개하였다. SAM은 방대한 역사 자료, 요즘 이슈들에 대한 시민들의 의견들, 공공정보, 뉴스 등을 언어학습모델에 기반하여 취합한다. 이를 바탕으로 시민들의 질문에 상시로 답하고 정책결정자들의 결정에 기초를 제공한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숱한 난관이 있겠지만, AI-휴먼 정치인을 통해 적어도 두 가지의 혁신을 기대할 수 있다고 믿는다. 첫째, 감정과 편견, 증오에 사로잡힌 현대 정치의 종말. AI에게는 감정이 없다. 상대에 대한 적개심도, 우리 편에 대한 광적인 집착도 없다. 따라서 상대편에 대한 분노와 모욕으로 뒤범벅된 우리 정치에 AI의 무감정이 도입된다면 역설적으로 정치의 정화, 이성의 회복이 가능하지 않을까? 이를 AI 시대 정치 이성의 재규정이라고 불러도 좋으리라.   둘째, AI-휴먼 정치인에게 대한민국 헌법, 3·1 독립선언문, 국내외의 정치학 고전들을 학습시키고 이를 모든 정책 결정의 기반으로 삼게 한다. AI 에이전트가 모든 정책 결정을 기계적으로 헌법정신에 종속시키도록 설계된다면, 법치에 대한 조롱, 법치의 오남용은 줄어들지 않을까? 정리하자면, 18세기 산업혁명으로 기계가 보급되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수공업) 노동의 종말이라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기계를 다루고 통제하는 호모 테크니쿠스의 역량을 발휘하면서 오늘의 경제적 번영과 보편 민주주의를 일구어왔다.   AI가 주도하는 제2의 기계 시대 역시 많은 두려움을 자아내고 있지만, 이미 AI를 훈련하고 협력하는 흐름은 빅테크 사무실, 의약 실험실, 첨단 스마트 팩토리 등 곳곳에서 진행 중이다. 마찬가지로 AI 정치인은 단순한 현실 도피용 꿈이 아니다. 여야 후보들보다는 나는 AI후보에게 투표하고 싶다.   장훈 중앙대 명예교수·본사 칼럼니스트

    2024.03.18 00:38

  • [이하경 칼럼] ‘대만 재앙’의 한반도 충격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

    이하경 대기자 미국 외교 전문지 포린어페어스는 지난달 ‘대만 재앙’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실었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대중국 정책을 설계한 매슈 포틴저 전 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부보좌관도 3인의 공동 기고자 중 한 사람이었다.   기고문은 중국이 대만을 합병하고 미국을 아시아에서 몰아낸다면 “미국의 동맹국들은 자체 핵무기 개발에 나설 것”이라고 했다. 한국과 일본은 이미 역량을 갖춘 것으로 분석했다. 이어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경제적으로 활성화된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인도양에 대한 미국의 접근을 어렵게 하는 힘을 갖게 된다”고 했다. 헤지펀드 매니저인 켄 그리핀의 “대만 반도체에 대한 접근권을 잃으면 미국 GDP가 5~10% 감소할 것이며, 이는 ‘즉각적인 대공황’을 의미한다”고 한 발언을 인용했다. 고(故)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포틴저에게 “미국이 ‘세계 해안에서 떨어진 섬’과 유사해지기 시작할 수 있다”고 경고했던 사실도 공개했다.     ■  「 미 CIA ‘중, 2027 대만 공격’ 공개 왕이 ‘한반도 전쟁 불가’ 말했지만 미국 힘 분산 위해 북 사주 가능성 한·미·일 안보태세, 대화 모두 필요 」    중국은 대만을 침공할 것인가. 윌리엄 번스 미 CIA 국장은 지난해 10월 “시진핑이 2027년까지 대만을 공격할 준비를 끝내라는 지시를 군에 내렸다”고 했다. 우자오셰 대만 외교부장도 “중국의 대만 침공 가능성이 더 커졌으며 시기는 2027년이 될 수 있다”고 했다. 2027년은 시진핑 집권 4기가 시작되고 인민해방군 건군 100주년이 되는 해다.   대만에서 전쟁이 터지면 한반도는 바로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중국 왕이 외교부장은 양회(兩會) 기간 중인 지난 7일 “세계는 이미 충분히 혼란스럽다. 한반도까지 전쟁이나 동란을 보태서는 안 된다”고 했다. 진심이기 바란다. 그러나 중국은 대만을 지키려는 미국의 힘을 분산시키기 위해 북한의 도발을 사주할 가능성이 높다. 윤석열 대통령은 2022년 9월 CNN 인터뷰에서 “중국이 대만을 공격한다면 북한 역시 도발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강력한 한·미 동맹을 바탕으로 북한의 도발에 대응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폼페이오 전 미국 국무장관은 올해 1월 “미국은 유럽과 중동에서 억지력을 잃었고, 아시아에서도 억지력을 잃기 직전이거나 이미 잃었다”고 했다.   트럼프가 백악관으로 돌아온다면 상황은 더 심각해진다. 바이든 대통령은 “대만을 지키겠다”고 했지만 트럼프는 지난해 9월 NBC 인터뷰에서 “대만을 방어하기 위해 미군을 보내겠느냐”는 질문에 “그렇게 말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는 주한미군 철수도 거론했던 사람이다. 대만과 한국 방위는 장사꾼 출신의 흥정 대상이 될 운명인가. 이 와중에 김정은은 남북관계를 “적대적인 두 개의 국가”로 규정하고 “대한민국을 주저 없이 초토화하겠다”고 협박하고 있다. 로버트 칼린과 시그프리드 헤커 박사는 “한반도 정세가 1950년 6월 초 이후 그 어느 때보다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한·미·일 3각 동맹을 강화하고 철저한 안보태세를 갖춰야 한다. 유사시 주한미군의 후방기지 역할을 할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시킨 것은 윤 대통령의 탁월한 업적이다. 동시에 대화도 해야 한다. 평화의 가능성을 높일 것이다. 적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대화는 필수다. 미국 NSC 대변인은 지난주 “한반도에서 우발적인 충돌의 위험을 줄이는 것을 포함한 여러 대화를 모색할 것”이라고 했다. 일본의 기시다 총리도 북·일 정상회담을 추진 중이고, 북한도 호응하고 있다. 정작 당사자인 한국만 다른 분위기다. 통일부 조직에선 ‘교류’가, 외교부에서는 ‘평화’와 ‘교섭’이 사라졌다. 이래도 되는 것일까.   북한이 호전성을 드러내는 것은 경제난으로 인한 내부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강대강으로만 맞서지 말고 지혜롭게 다양한 카드를 준비해야 한다. 안정된 민주주의와 세계 수준의 경제력을 가진 한국은 지킬 것이 너무도 많은 나라다. 북의 온건파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강력한 신호를 보낼 필요가 있다.   한반도는 지구상 최악의 지정학적 화약고다. 소련은 미국과 힘을 합쳐 제2차 세계대전을 끝장냈다. 그러나 불과 5년 만에 김일성에게 설득당한 소련이 중국까지 끌어들여 한·미와 대결한 “3차 세계대전의 대체물”(윌리엄 스툭 조지아대 석좌교수)이 한국전쟁이다. 북한·중국·러시아가 다시 가까워지고 있다. 이럴수록 안보태세를 단단히 하되 대화 노력을 포기해선 안 된다.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도는 대만해협에서도 중국과 대만은 2010년 체결한 양안 경제협력기본협정(EFA)을 유지하고 있다. 지난해 대만의 대중국 수출액은 1522억 달러였다.   남과 북은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고, 강대국들은 쉴 새 없이 으르렁거린다. 이렇게 험악한 한반도에서 평화가 이뤄질 수 있을까. 우리의 간절함이 출발점이 될 것이다. 만일 한반도에 비핵 평화가 찾아온다면 1795년 칸트가 “전쟁은 악인을 제거하기보다 많이 만드는 점에서 나쁘다”면서 주창한 전 세계의 영구평화가 실현되지 않을까. 이하경 대기자

    2024.03.11 00:36

  • [최훈 칼럼] 비움이 없는 이재명 대표의 ‘정치적 그릇’

    최훈 주필 인생만사 새옹지마란 정치에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아직 1라운드지만 두세 달 전에 비해 총선 판세가 확 뒤집혔다. 지난 연말만 해도 “정권 견제, 야당 다수 당선 기대”가 51%를 넘어서며 죽을 쑤던 쪽은 국민의힘이었다. 반대로 더불어민주당은 “수도권을 석권하면 200석도 가능, 윤석열 정부 탄핵도 할 수 있다”며 기세등등했었다. 그러던 흐름이 요즘은 “여당 다수 당선 희망” 38%, “제1 야당 다수” 35%, “제3지대 다수” 16%(한국갤럽 2월 27~29일)로 뒤바뀌었다.     ■  「 ‘비명횡사 친명횡재’에 흐름 반전 ‘여당 다수’ 기대, ‘민주 다수’ 앞서 비우질 않아 채움도 없는 이 대표 여야 어디든 ‘오만·독주’면 필패  」    이런 반전은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탐욕’ 이미지 때문이다. 180석 공룡 정당을 물려받은 이 대표의 대권욕이 당내 분란과 민심 이반을 불렀다. 이미 지사·국회의원·제1당 대표의 자리에 올라선 이 대표로선 마지막 정점인 대통령에의 꿈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2년 반 뒤 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이겨야 한다. 당내의 절대적 지지 기반? 필수다. 백현동·대장동·대북 송금 관련 체포동의안에의 반란표? 한 번 당해 봤으니 철벽을 쳐야 한다. 조금이라도 걸림돌 될 세력과 인물들? 아예 싹을 잘라놓아야 할 터다.   소년공 시절 야구 글러브 공장 프레스에 눌려 왼쪽 팔이 굽어버린 이 대표는 “내 생에 봄날은 없다”고 그 시절을 회고했었다. 그러곤 자서전 말미에 “좌절의 밑바닥에서야 비로소 싹텄던 희망의 씨앗” “숨이 턱에 차도록 페달 밟아 올라가야만 겨우 문이 열렸던 운명의 고갯길” “결국 정상의 희열을 맛볼 수 있었던 인생의 섭리”라고 자기 삶을 정리했었다.   정치적으론 승승장구였던 그에게 요즘 네 가지 판단 착오가 드러났다. “아니 이 정도까지 할진 몰랐다”는 당심, 민심의 이반이 나타난다. 지난해 강서구청장 선거 압승에 이어 ‘김건희 여사 명품백’ 사건은 자만을 키운 양분이 됐다. “불체포특권 포기”를 호언했다가 자신의 체포동의안 표결 전날 ‘반대표’를 요구하자 믿지 못할 사람이 돼버렸다. ‘위성정당 금지’의 대선 공약과 달리 “멋지게 지면 무슨 소용이냐”며 다시 위성정당을 수용, 불신은 더해졌다. ‘비명횡사 친명횡재’ 공천은 그 모든 욕심의 정점이다.   야당은 내려놓고 비웠을 때 승리했다. 정책·인사·예산 권력을 모두 쥔 여권과의 싸움에선 민심 얻을 명분이 유일한 무기다. 2016년 총선 직전 야권의 분열로 “여당 180석” 전망이 나올 때 민주당은 당의 주류인 이해찬·정청래를 공천에서 내치는 초강수 쇄신을 했다. 단 1석 차이 원내 1당에 올라섰다. 노무현을 대통령까지 만든 건 스스로 사지(死地)인 영남에서 두 차례나 낙선하면서도 ‘지역구도 타파’의 명분을 지킨 삶의 궤적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총재 시절 ‘당내 독재’란 얘기 듣는 걸 극도로 꺼렸다. 모든 당내 경선 때마다 김상현·정대철·이기택 등 비주류 경쟁 주자들이 오히려 적절한 약진을 해주길 골몰했다. ‘대통령의 그릇’인 이가 대통령이 된다.   지금 이 대표에겐 ‘대통령의 그릇’임을 보여 줄 명분도, 원칙과 소신도, 배짱과 결기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소양이 없다면 그냥 머리 안 좋은 정치인이다. 그런데 내친 공천 자리에 친명 호위무사들만 채우려 한다면 그건 나쁜 정치인이다. 탐욕이다. 대통령 꿈꾸는 이가 양지 바른 텃밭인 인천 계양을에서 금배지 한 번 더 다는 게 무슨 명분이 있는가. 아무 것도 내려놓지 않고, 버리지도 않으니 새로 쌓아 갈 공간은 없다. 혹 자수성가형의 심리 특성인 ‘이룬 것에의 집착’은 아닐까. “정치는 노무현이처럼 버리며 해야 한다”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살아 있다면 지금 이 대표를 보고 뭐라 했을까.   그의 예상 밖 두 번째 착오는 국민의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의 상대적 선전일 터다. 큰 잡음 없이 안정적이다. 유세의 동선과 메시지 등도 중도층에 거부감이 적다. 물론 혁신이나 감동도 없다는 평가가 공존하지만…. “한 위원장 잘한다” 52%(‘잘못’ 42%), “이 대표 잘한다” 36%(‘잘못’ 61%)가 최근 민심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선거 쟁점에서 사라진 건 그에겐 세번 째 혼돈이다. 지난달만 해도 29%대 지지도의 대통령과 이재명 민주당의 대결 구도로 승리를 장담했지만 돌연 타깃이 증발해 버렸다. 이젠 이재명 대 한동훈의 대결 구도다. 더구나 사흘 전 윤 대통령의 지지도가 8개월 만의 최고치인 39%(한국갤럽)로 치솟았다. “의대 증원에의 뚝심” 평가가 그중 21%다. 여당 총선 승리의 필요조건 중 하나가 대통령 지지도 40%였다. 이대로라면 총선은 ‘윤석열 심판’이 아니라 ‘이재명 심판’이 될 수도 있다.   마지막 이 대표의 혼란은 신당이다. 거대 정당에의 혐오로 제3지대 정당이 자리잡을 공간이 커졌다. 더구나 이준석·이낙연 신당은 물론 심지어 조국 신당까지 민주당 측의 표를 더 삭감할 구도다. 아직도 무당층·중도층은 19~29%다. 총선 결과 예측은 그러니 신의 영역이다. 하지만 분명한 변수가 하나 있다. 누가 더 기득권을 내려놓고, 비우며, 새로운 정치개혁 영혼을 채워가느냐다. 오만과 독주를 심판하러 기다리는 게 대한민국 선거다. 37일이 남았다. 최훈 주필

    2024.03.04 00:36

  • [고현곤 칼럼] 교수·관료·법조인 부업으로 변질…사외이사 유감

    고현곤 편집인 사외이사를 본격 도입한 건 1998년 2월이다. 외환위기 직후였다. 기업의 민낯이 드러나자 대주주와 경영진의 전횡을 감시해야 한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이사회에 외부 전문가 사외이사를 의무적으로 두도록 했다. 이들에게 기업 내 야당 역할을 기대했다. 나라의 명줄을 쥐고 있던 국제통화기금(IMF)의 권고사항이기도 했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다들 진지했다. 그해 9월 중앙일보에 이런 기사가 나온다. ‘A사가 자금난을 겪는 계열사를 지원하려고 했다. 사외이사들이 주주에게 피해를 준다며 반대해 결국 지원은 무산됐다. 곳곳에서 경영진과 사외이사 간에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다.’ 요새는 드문 풍경이다. 지난해 100대 기업 이사회에서 사외이사가 반대표를 던진 것은 0.4%에 불과했다. ‘거수기’라는 오명이 따라 다닌다.     ■  「 교수·관료·법조인 부업으로 변질 기업 감시 초심 잃고 경영진과 유착 지배구조 엉망, 정부 낙하산 악순환 3월 주총 줄대기 전 각자 돌아보길 」    처음에는 사외이사 보수가 많지 않았다. 급여를 주지 않는 기업도 있었다. 삼성·LG·현대차처럼 큰 기업이 활동비·자문비 명목으로 월 200만원 남짓 지급했다. 포스코는 매달 한 차례 이사회 때마다 50만원의 거마비를 지급했다. 연봉으로 치면 600만원. 지금은 평균 연봉 1억500만원. 화폐가치가 떨어진 점을 감안해도 격세지감이다. 사외이사 연봉 1억원 넘는 기업이 삼성전자·SK·SK텔레콤 등 13곳에 달한다. 이쯤 되면 부업인지, 본업인지 헷갈릴 정도다.   방만한 경영을 막기 위해 사외이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던 교수들이 그 자리를 꿰찼다. 98년 3월 서울대가 사외이사 겸직을 허용했다. 처음엔 무보수에 한해서였다. 절제된 맛이 있었다. 지금은 서울대 전임 교원 중 9.4%(215명)가 사외이사를 맡고 있다. 물론 보수를 받는다. 교수들은 사외이사 소득 일부를 학교발전기금으로 낸다. 서울대가 거둔 돈만 지난 4년간 35억원. 대학과 교수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구조다. 관료들도 현직에서 물러나면 사외이사 자리부터 알아본다. 노후 대책으로 이만 한 게 없다.   인맥을 총동원해 기업에 줄을 대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전세는 역전됐다. 기업이 갑이 돼 입맛에 맞는 사람을 고른다. 적당한 간판에 까다롭지 않은 사람을 환영한다. 바람막이나 대외 로비에 활용할 수 있으면 금상첨화다. 교수와 관료·법조인이 기형적으로 많은 이유다. 지난해 100대 기업 사외이사 457명 중에 42%가 교수다. 기업인은 19%, 관료 15%, 법조인 13%다. 4대 금융지주·은행(KB·하나·우리·신한)은 교수가 특히 많다. 사외이사 50명 중 36명이 교수다.   56년 사외이사를 가장 먼저 도입한 미국은 정반대다. 사외이사의 80~90%는 풍부한 사업 경험을 가진 전문경영인이다. 경쟁사 최고경영자(CEO) 출신을 영입한다. 미국 기업 절반은 사외이사에 교수가 한 명도 없다. 이사회는 긴장감이 흐른다. 지난해 오픈AI 이사회가 ‘챗GPT의 아버지’ 샘 올트먼 CEO를 전격 해임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세상을 놀라게 한 쿠데타였다. 일론 머스크와 스티브 잡스도 자기가 창업한 회사에서 쫓겨난 적이 있다. 이사회 결정의 잘잘못을 떠나 우리는 상상하지 못할 일이다.   국내에서 끝판왕은 포스코, KT, KT&G, 금융지주 등 ‘주인 없는 기업’의 사외이사다. 회사별로 차이는 있으나 업계의 정설은 이렇다. 회장은 가까운 사람을 사외이사로 앉히고, 최고의 대우를 해 준다. 사외이사는 회장의 연임을 돕는다. ‘셀프 연임’에 성공한 회장은 다시 사외이사를 연임시킨다. 회장이 물러날 때는 배신하지 않을 측근을 후임 회장에 앉히기도 한다. 견제도 받지 않는다. 명실공히 ‘그들만의 기득권 카르텔’이다. 기업 지배구조가 떳떳하지 못하니까 정부가 만만히 보고 ‘낙하산 인사’를 내리꽂는 것 아닌가.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원인이기도 하다.   포스코는 지난해 8월 캐나다 호화 이사회로 경찰 수사를 받고 있다. 1주일 동안 이사회는 딱 한 번 열었다. 나머지는 전세 헬기를 타고 시찰, 관광, 골프로 6억8000만원을 썼다. 강심장이다. 최정우 회장이 3연임을 노리던 중이었다. 후임 회장을 뽑는 사외이사 7명이 참여했다. 물의를 빚자 사외이사 측은 “새 회장을 뽑는 중요한 시기에 후보추천위원회의 신뢰를 떨어뜨려 이득을 보려는 게 아닌가”라고 맞받아쳤다. 사과도, 사퇴도 없다. 회사 내에선 “병당 120만원짜리 와인을 곁들인 게 화근”이라는 말이 나온다. 최고급 와인을 먹는 바람에 재수없게 걸렸다는 건가. ‘사심 없이 헌신하라’는 박태준 초대 회장의 창업 정신은 온데간데없다.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세운 기업에서 이런 일이 있어선 안 된다. 회사에 손실을 끼쳤는지 철저히 수사해 책임을 물어야 한다. 후임 회장은 뒤틀린 이사회부터 바로잡기 바란다.   3월은 12월 결산법인의 주총 시즌이다. 사외이사 시장도 큰 장이 섰다. 사외이사의 세 가지 자격 요건은 전문성·독립성·도덕성이다. 올봄 한 자리를 차지하려고 막판 줄대기에 바쁜 사람이라면 스스로 자격을 갖췄는지 돌아봤으면 한다. 초심을 잃고 변질된 사외이사야말로 개혁 대상이다. 고현곤 편집인

    2024.02.27 00:38

  • [염재호 칼럼] 인구절벽과 우수 유학생 유치정책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예일대학교 로스쿨 에이미 추아(Amy Chua) 교수의 책 『제국의 미래』를 보면 역사상 강대국으로 부상한 제국의 특징은 외부 세력에 대한 관용과 포용에 있었다. 당나라 제국의 발흥도 많은 외국인을 유입시켜 포용한 정책에 기인했다고 책에서 설명한다. 수도 장안(長安)에는 당시 지구상 도시 중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있었고 인종의 다양성도 뛰어났다.   당 태종은 신라인 7만 명을 받아들였고 신라의 귀족과 관리들을 관직에 등용했다. 신라 후기에는 매년 100여 명의 6두품 이하 자제들이 당나라로 건너가 10년 정도의 유학생활을 했다. 840년 한 해에 105명 유학생이 동시에 신라로 귀국했다는 기록까지 있다. 당나라 홍로사(鴻臚寺)에서는 외국 유학생을 위해 숙식과 의복을 제공하는 장학제도를 운용했다. 당나라 과거시험에 906년까지 58명, 이후 925년까지 22명의 신라인이 급제했다.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알려진 최치원도 당나라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감찰과 문한을 맡는 도통순관과 관역순관이라는 직책으로 복무하다가 17년 만에 고국 신라로 귀국했다.     ■  「 제국의 강점은 다양성과 포용력 국가경쟁력 핵심은 인력시스템 해외인력으로 인구절벽 극복해야 우수 유학생 유치 위한 전략 시급 」    미국은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찾아온 이민자들의 천국이었다. 2차 세계대전 전후 1933년부터 1950년 사이에 13만 명에 달하는 유럽 지식인들이 미국으로 망명했다. 1945년 이후 아시아계 미국 이민자 숫자는 약 2200만 명에 달해 인구의 6.8%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전체 인구 3억3000만 명 가운데 백인 57.8%, 히스패닉 18.7%, 흑인 12.4% 다음으로 많은 숫자다.   미국, 캐나다, 브라질은 건국한 연도와 국토면적은 비슷하지만 이민을 적극 수용한 미국만 강대국이 되었다. 미국은 1776년, 브라질은 1822년, 캐나다는 1867년 건국했다. 국토 면적은 미국 983만㎢, 캐나다 998만㎢, 브라질 851만㎢로 비슷하다. 하지만 인구는 미국이 3억3000만 명인 데 비해 브라질은 2억1000만 명, 캐나다는 3400만 명에 불과하다. 인종 분포도 캐나다는 73%가 유럽계이고, 브라질도 유럽계 백인 47.7%에 백인과 흑인 혼혈 물라토 43.1%로 다양하지 않다.   지금 미국 경제에서 지식노동은 한국, 인도, 중국 등 아시아계 인력에 의존하고 육체노동의 대부분은 히스패닉이 담당하고 있다. 첨단산업의 메카 실리콘 밸리의 인구 비중에서 소프트웨어 개발자의 36.2%, 컴퓨터 엔지니어의 29.6%가 아시아계이다. 미국 건설현장 노동자의 60%는 히스패닉이 담당한다. 히스패닉 인구가 42.1%를 차지하는 뉴멕시코, 32%가 넘는 캘리포니아와 텍사스에서는 이들이 없으면 경제가 돌아가지 않는다고 한다.   인구절벽을 맞은 우리나라의 미래는 심각하다. 2016년 생산가능인구는 3763만 명으로 정점을 찍고 하락하고 있으며, 2022년 합계출산율은 0.78명까지 내려갔고, 총인구도 2020년 5184만 명을 정점으로 감소하고 있다. 이런 추세로 가면 2100년에 인구가 2000만 명대가 된다고 한다. 이제 저출생 문제를 심도 있게 검토하고 다각도로 미래 인구전략을 강구해야 한다.   홍콩과기대 김현철 교수의 홍콩 가사도우미 경제학은 흥미롭다. 홍콩이 1974년 외국인 가사도우미 제도를 도입한 이후 대졸 여성 노동시장 참여율이 평균 25% 상승했다고 한다. 2022년 홍콩에는 약 34만 명, 싱가포르에는 약 27만 명의 외국인 가사도우미가 있다. 다음 달부터 고용노동부와 서울시의 시범사업으로 필리핀에서 100명의 가사도우미가 입국하게 된다. 가사도우미 외국인 노동인력 유입이 본격화되면 출생률 변화도 기대해볼 만하다.   외국인 유치에서 단순 노동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우수 인재 영입이다. 학령인구가 줄어들고 대학등록금 억제정책 때문에 사립대학들이 자발적으로 추진해온 외국유학생 유치 활동을 넘어서 정부가 체계적으로 우수 유학생 유치를 위한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초중고 12년간의 교육비용을 자국에서 부담한 우수 인력들이 대학과 대학원에 유학생으로 들어와서 우리의 고급인력으로 정착하면 국가적으로 큰 도움을 얻게 된다. 현재 미국에는 약 95만 명, 일본은 약 35만 명의 외국인 유학생이 있다. 우리는 약 16만 명의 유학생이 있는데 정부는 2027년까지 30만 명까지 늘리겠다고 한다. 단순한 숫자보다 질적으로 우수한 유학생을 확보할 전략이 필요하다. 우수 유학생 유치정책으로 일본 정부는 일본학생지원기구(JASSO)를 통해 도쿄 오다이바에 국제연구교류대학촌 시설을 유치하고, 도쿄국제교류관에 외국인 유학생과 연구자를 위한 주거시설을 건립했다.   앞으로 지구촌 노동력은 더욱 활발하게 이동할 것이다. 선진국으로 가는 지름길은 우수 인력 확보를 위한 시스템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구축하는 데 달려있다. 이제 단일 민족의 차원을 넘어 다양성과 다문화를 끌어안아야 한다. 제국의 역사에서 보았듯이 포용의 힘이 국가경쟁력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2024.02.21 00:48

  • [이하경 칼럼] 되살려야 할 이승만과 제헌국회의 협력

    이하경 대기자 우남(雩南) 이승만은 대한민국을 공산 세력으로부터 지켜낸 거인(巨人)이다. 강대국 미국은 오판을 거듭했지만 우남은 오차 없는 국제정세 판단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다. 김덕영 감독의 다큐영화 ‘건국전쟁’을 관람했다. 많은 분이 “저평가된 우남의 실체를 알게 됐다”고 했는데 실제 그랬다. 우남의 전모를 보다 균형 있게 파악하려면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 제헌국회와의 갈등과 협력을 편견 없이 바라볼 필요가 있다.   1948년 미군정이 끝나가면서 우남에게는 빡빡한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5·10 총선, 헌법 제정, 대통령 선출, 내각 구성을 통해 정부를 출범시키고 미군정으로부터 행정권을 넘겨받아 8월15일 신생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해야 했다. 9월21일 시작되는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을 받는 것도 중대사였다.     ■  「 미국 오판으로 초래된 북의 남침 우남, 초인적 노력으로 나라 구해 제헌국회, 당략 초월 ‘민주’ 지켜 한반도 위기 대비 견제·협력 필요 」    그래서 5월31일 구성된 제헌국회에 “1분이라도 빨리 우리 헌법을 통과시키자” “비율빈(필리핀)은 이틀 만에 만들었다”고 채근했다. 일본은 착수 9년 만인 1889년에 메이지 헌법을 제정했는데 한국은 한 달여 만에 해치웠다. 우남은 나라를 잃은 뒤 외교를 통한 독립을 성취하는 데 한평생 매달렸지만 좌절했다. 그래서 새 정부 수립의 성공 가능성을 100% 낙관하지 못했다. 남로당의 준동도 불안감을 키웠다. 그가 실권을 가진 초당적 지도자가 되려 한 배경이다.   반면에 최초의 국가기관인 제헌국회는 민주적 절차를 중시했다. 우남의 거부로 내각책임제에서 대통령제로 급선회했지만 헌법에서 내각제적 요소를 최대한 살렸다. 대통령의 결정은 국무회의 과반수 의결을 거쳐야 집행될 수 있게 했다. 국회는 총리를 인준하고, 총리와 장관을 부를 수 있도록 만들었다. 대통령의 설명을 요구했고, 정부의 책임성(accountability)을 제도화했다.   제헌국회는 재석 196명 중 180명의 압도적 찬성으로 우남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확고한 국부(國父)의 위상이 확인됐다. 문제는 초대 국무총리 인선이었다. 우남은 김성수·신익희·조소앙 등 국회가 원하는 지도자 대신 북에서 내려온 목사 이윤영 의원을 선택했다. 국회는 압도적인 표 차이로 부결시켰다.   우남이 담화를 통해 “인준 부결은 파벌주의 때문이며 참된 민의가 아니다”고 하자 “이런 어법은 천황제와 비슷하다”(노일환 의원)는 반발이 나왔다. 파국 일보 직전에 대반전이 일어난다. 우남은 국회에 나와 “국회가 대통령이 임명한 국무총리를 인준하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나라가 전제국가가 아니라 민주국임을 증명하는 것”이라며 “환영한다”고 물러섰다.(『오늘이 온다』 권기돈)   임기 2년의 제헌의원 200명은 “1인1당”의 자유를 누렸다. 독립된 헌법기관으로 당당하게 발언했다. 대부분 짐칸에 덮개를 씌운 트럭이나 전차를 타고 출퇴근했지만 주말에도 국회에 나와 치열하게 토론했다. 온갖 특권을 누리면서 당리당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지금의 의원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1950년 1월19일 미국 하원이 6000만 달러 규모의 한국경제원조안을 부결시켰다. 국회는 원조를 요청하는 메시지를 보내기로 했다. 조헌영 의원은 찬성하면서도 “왜 부결시켰는지는 알아야 한다. 미국은 한국이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고 본다”고 대통령을 향해 직격탄을 날렸다. 정파를 초월해 존경받았던 ‘토론 종결자’ 조 의원은 고려대 교수였던 조지훈 시인의 부친이고, 조태열 외교부 장관의 조부다.   일주일 뒤인 1월 26일 민국당 서상일 의원 외 78인은 “대통령제로는 민주적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며 내각제 개헌안을 발의했다. 야당 출신 신익희 국회의장은 개헌에 찬성하면서도 우남을 “나라의 지보(至寶)이고 국부”라며 “그분이 종신대통령이 되기 바란다”고 했다. 국정 운영의 일방통행은 거부하지만 우남이 존경받는 인물임은 인정했다.   우남은 1949년 상반기 미군 철수가 기정사실화되자 북한의 남침을 우려해 군사적 지원을 요구했다. 미국은 거꾸로 북침을 우려해 외면했다. 2차 세계대전을 막 끝낸 미국은 한반도에서의 남북 충돌로 3차대전이 터지기를 원하지 않았고, 소련도 같은 입장일 것으로 오판했다. 우남의 판단이 맞았다. 피란길에 허정을 만난 우남은 “미국놈에게 속았다”고 했다.(『허정 회고록』) 하지만  초인적 노력으로 미국의 지원을 끌어냈고, 반공포로 2만5000명을 석방하는 광인(狂人)전략까지 동원해 소원하던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거머쥐었다.   제헌국회는 1949년 농지개혁법을 통과시켜 소작농을 자작농으로 만들었고, 6·25전쟁 중의 민심이반을 막았다. 우남과 제헌국회가 합력했기에 가능했다. 한반도 정세는 6·25 전과 흡사하다. 중국·러시아·북한은 밀착 중이고, 트럼프는 동맹을 헌신짝으로 여기고 있다. 우남처럼 국제정세를 꿰뚫고 강대국에 맞서는 용기 있는 지도자, 당리당략을 초월해 견제와 협력에 나선 제헌의원들의 2인3각 애국심을 되살려야 한다. 이하경 대기자

    2024.02.19 00:45

  • [장훈 칼럼] 한동훈 현상:세대 교체론, 자질론

    장훈 중앙대 교수·본사 칼럼니스트 #1 역설 한 가지. 우리 정치에서는 현실이 상상력을 앞질러 간다. 필자는 그동안 금년 말에나 한동훈 현상에 대한 칼럼을 써볼까 생각 중이었다. 하지만 한동훈 현상은 예상을 앞질러 현실정치의 중심에 서 있다. 한 위원장은 여당 내 힘겨루기뿐만 아니라 제1야당과의 경쟁에서도 중추를 이루고 있다. 심지어 4월 총선은 정부 심판론보다 여당 비대위원장 평가가 우선하는 특이한 선거가 될 조짐마저 보인다. 새 정치 스타가 솟구쳐 오르다 보니, 뜨거운 열광과 싸늘한 냉소가 이어진다. ‘73년생 한동훈’에 대한 지지층의 기대가 폭발하는가 하면 다른 쪽에서는 비판을 넘어선 험한 말들이 쏟아진다.     ■  「 탈산업화 세대 정치리더의 등장 윤·한 갈등은 세대 갈등이기도 공직 우등생이 정치리더로 변신 특권 폐지 등 리더 역량 시험대에 」    #2 이 칼럼의 목적은 한동훈 현상에 대한 찬양이 아니다. 그렇다고 맹렬한 비난에 동참하지도 않을 것이다. 열광과 냉소를 떠나 세 가지 관점에서 한동훈 현상의 의미를 짚어보려 한다. ①세대교체론. 윤석열 대통령이 산업화 시대 세계관의 마지막 계승자라면, 한동훈 위원장은 탈산업화 세대가 보수 정당의 주류로 등장했다는 신호탄이다. ②자질론. 한동훈 위원장은 한국의 교육 체제가 길러낸 최상급 인재이다. 뛰어난 문제풀이 능력을 바탕으로 세속적 성공의 사다리를 밟아온 이 제도권 인재는 과연 정치의 험난한 세계에서도 능력을 발휘할까? ③민주화 세대 청산론. 한동훈 장관이 여당 리더로 변신하면서 내세운 최우선 과제는 민주화 특권 계급 청산론이었다. 과연 그의 문제 설정에 대해 동료 시민들은 얼마나 지지를 보낼 것인가?   #3 먼저 세대론. 민주화 이후 보수 계열 정당에서 세대교체의 과제는 사실 같은 문제의 무한 반복이었다. 누가 언제 산업화 시대의 세계관, 멘탈리티를 벗어나 새로운 흐름을 만들 것인가?   이준석 대표 체제의 막간극을 거쳐 윤석열 정부 3년 차를 맞으면서 윤 정부가 산업화 세계관의 마지막 주자라는 점은 명확해지고 있다. 임기 초반의 각오와는 달리 점차 관료 중심주의, 성장 목표에의 몰입, 수직적 소통에 기대는 모습은 산업화 멘탈리티의 회귀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 보니 “술을 전혀 안하고 대신 커피를 마시는” 신인류 한동훈 위원장이 상징하는 세대, 문화적 기호들은 지지자들 사이에서 뜨거운 호응을 얻고 있다. 커피, 음악, 옷맵시 등은 단지 개인 취향이 아니다. 그가 상징하는 취향의 발산은 곧 구시대의 집단주의, 위계질서, 돌격 정신을 거부하는 것이다.   오렌지 세대(혹은 서태지 세대) 리더의 부상에 적지 않은 이들이 당황해하고 있지만, 사실 이들이 곳곳에서 주도적 위치를 차지한 지는 꽤 됐다. 기업, 문화예술계, 과학기술계에서 이들 세대는 진작 주류로 진입해 있다. 다만 기득권의 철옹성이었던 정치, 특히 정당정치에서 이들 세대의 주류화가 미뤄져 왔을 뿐이다. 결국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위원장의 갈등은 한편으론 당-정 갈등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지연되어 온 정치세대교체를 둘러싼 갈등이기도 하다.   #4 윤 대통령-한 위원장의 세대 갈등(과 봉합)이 빚어내던 만큼의 극적 요소들은 많지 않지만, 필자가 눈여겨보는 것은 한동훈 위원장의 자질을 둘러싼 토론이다. 한편에서는 그의 군더더기 없는 언어 구사와 상황 요약 능력을 떠받들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제1야당에 맞서는 말싸움 실력 외에는 보여준 것이 없다는 냉소적 평가도 뒤따른다.   하지만 자질론의 핵심은 한동훈 위원장의 화려한 경력을 뒷받침해 온 자질과 정치리더로서의 자질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데 있다. 대학입시-사법시험-검찰 요직을 거치며 한 위원장이 세속적 성공의 길을 달려온 바탕에는 탁월한 문제풀이 능력이 있었다. 법률, 대학 교육과정이라는 분명한 준거들이 있고 이 준거들 안에서 문제를 빨리 효율적으로 푸는 것이 그의 검증된 능력이었다.   반면 정치의 세계에서 리더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문제풀이와는 전혀 다르다. 문제의 범위가 정해져 있지 않으며 따로 모범답안이 나와 있지도 않다. 대표 사례들을 꼽아보자. 인구위기, 사회 양극화, 인공지능의 도전, 기후변화. 이들 가운데 가장 시급한 문제는? 가장 해결이 어려운 문제는? 가장 비용이 많이 드는 문제는?   결국 주어진 문제를 풀이하기보다 문제의 우선순위를 살피는 능력, 문제를 새롭게 바라보는 능력, 문제 해결의 완급 조절이 곧 리더의 자질이다. 이 점에서 한동훈 위원장의 정치적 자질 검증은 현재 진행형이다.   검증의 첫 무대는 당연히 이번 총선의 핵심 이슈들이다. 한동훈 위원장은 세대교체, 특권 정치의 타파, 민주화 운동세력의 청산을 이번 선거의 핵심 과제들로 내걸었다. 이러한 문제설정에 유권자들이 얼마나 호응하는가에 따라 우리 정치는 방향을 바꾸게 된다. 지루하게 이어져 온 산업화세대-민주화 운동세대의 패권이 마침내 막을 내릴지? 민주화 이후 심화하여 온 정치 귀족들의 특권화는 멈추게 될지? 새로운 세계관으로 무장한 세대가 여야 정당을 주도하는 시대가 열리게 될지?   장훈 중앙대 교수·본사 칼럼니스트

    2024.02.05 00:36

  • [고현곤 칼럼] 닥치고 가덕도

    고현곤 편집인 동남권 신공항을 처음 꺼낸 건 2006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이듬해 이명박 후보가 대선 공약으로 받았다가 2011년 백지화했다.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다시 후보지 세 곳을 평가했다. 가덕도는 꼴찌였다. 파리공항공단 측은 김해신공항 818점, 밀양 665점, 가덕도 635점을 줬다. 장마리 슈발리에 수석연구원은 “가덕도는 국토 남쪽 끝에 있어 접근성이 떨어지고 건설비가 많이 든다. 공항 입지로 적합하지 않다”고 말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다시 군불을 땠다. 김해신공항을 흠집 내더니 부산시장 재·보궐 선거를 앞둔 2021년 느닷없이 가덕도로 바꿨다. 1등(김해)이 문제 있다며 2등(밀양)을 건너뛰고, 3등(가덕도)으로 직행했다. 기이한 결정이었다. 예비타당성조사를 면제하는 특별법을 만들어 대못을 박았다. 부산 표를 구걸하는 야당(국민의힘)이 합세했다. 일사천리의 진풍경이었다. 예타 면제는 두고두고 나쁜 선례로 남았다. 지난주 통과한 ‘달빛철도특별법’도 가덕도의 아류다.     ■  「 부산 표 구걸…여야 합작 ‘정치공항’ 활주로 1개 13조, 김해공항의 세 배 무리한 공기 단축, 부등침하 우려 엑스포 없는데 조기 개항해야 하나 」    지난해 3월 윤석열 정부는 2030 부산엑스포전에 개항하겠다며 공사 기간을 5년6개월이나 앞당겼다. 마음만 먹으면 뚝딱 줄일 수 있는 건지 의아했지만,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다. 당초 안은 바다에 짓는 것이었는데, 바다와 육지에 걸쳐 짓는 공법으로 바꿨다. 매립 규모가 줄면 공기를 단축할 수 있다. 꼴찌인 가덕도에, 공법도 최선이 아닌 차선으로 누더기가 됐다. 활주로 달랑 1개의 여야 합작 ‘정치공항’이 탄생하는 것이다.   가장 큰 논란은 안전 문제다. 특별법 처리 당시 국토부는 “진해 비행장과 공역이 중첩되고, 김해공항 관제 업무가 복잡해져 안전사고 위험이 증가한다. 수심이 30m에 이르고 태풍이 지나는 길목”이라고 지적했다. 활주로 1개로는 화재 등 비상 상황에 대처하기 어렵다. 부등침하(땅이 불균등하게 가라앉는 현상) 우려도 있다. 2022년 사전타당성조사 연구진은 “바다~육지 공항은 지반의 지지력 차이가 커서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바다 쪽 활주로가 육지 쪽 활주로보다 많이 가라앉을 수 있다는 의미다.   난공사로 비용도 많이 든다. 김해공항 확장에 4조7000억원이 필요하다. 가덕도는 세 배인 13조5000억원. 활주로를 1개 추가하면 7조원이 더 든다. 도로와 공항철도, 해상여객터미널 건설비는 별도다. 외항에 짓는 만큼 여러 변수가 생길 수 있다. 실제 사업비는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따르면 가덕도의 비용 대비 편익 비율은 0.58이다. 공항을 지어서 얻는 편익이 비용의 절반에 그친다. 경제성으로 따지면 지어선 안 된다는 얘기다. 원안대로 김해공항을 확장하고, 남는 세금은 어려운 이웃 돕는 데 쓰는 게 낫지 않을까.   이용객은 불편하다. 부산에서 가덕도는 김해공항보다 멀다. 활주로 1개로는 국내선이 들어갈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국제선은 가덕도, 국내선은 김해공항으로 이원화된다. 항공사는 비용이 증가한다. 공항이 불편하고 비싸면 흥행이 안 된다. 텅 빈 활주로에 고추를 말리는 전남 무안공항처럼. 이미 웬만한 수요는 인천공항 2여객터미널과 서울~부산 KTX가 흡수했다. 자칫 부산 시민은 들러리 서고, 가덕도 인근 땅 주인과 관련 업자만 배 불리는 구조가 될 수 있다.   정부는 사정을 잘 알면서도 침묵한다. 그러는 사이 가덕도 시계는 돌아간다. 지난해 말 기본계획을 고시했고, 올해 5000억원 넘는 예산을 편성했다. 정권이 바뀌어도 담당 공무원이 직무유기로 검찰에 불려가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보수·진보가 모처럼 한통속이기 때문이다. 여야 정치인들은 표만 생각한다. 문제점에 눈 감고, 지역에 장밋빛 환상을 심었다. 문 전 대통령은 특히 노골적이었다. 2021년 부산시장 선거를 앞두고 가덕도 앞바다에서 “신공항 예정지를 눈으로 보니 가슴이 뛴다”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도 별반 차이가 없다. 지난해 12월 엑스포 불발 1주일 만에 부산을 찾았다. “지역 현안 사업은 그대로 더 완벽하게 진행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개항을 무리해 가며 5년 이상 앞당긴 건 엑스포 때문이었다. 유치에 실패하니 이번엔 민심을 달래기 위해 조기 개항을 밀어붙인다. 어처구니없는 악순환이다. 촉박한 엑스포 시간표가 없어진 만큼 안전과 비용을 따져 다시 검토하는 게 맞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한술 더 떴다. 지난해 12월 “윤석열 정부가 가덕도를 국내 공항 정도로 대폭 축소해서 땜질한다는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이재명 스타일의 저열한 비방이다.   젊은 정치인도 오십보백보다. 2021년 7월 당시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가덕도 특별법은 우리 당이 앞장서 입법했다”고 자랑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최근 부산을 찾아 “조기 개항을 차질 없이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기존 정치와 선을 긋고, 새 바람을 불어넣겠다면서 똑같은 구태 정치를 한다. 다들 자기 장사와 표 계산에 바쁘다. 세금을 자기 돈처럼 아껴 쓰고, 자신보다 나라의 앞날을 더 걱정하는 지도자가 안 보인다. 좌우, 신구를 막론하고. 고현곤 편집인

    2024.01.30 00:52

  • [이하경 칼럼] 제왕적 대통령제 유감

    이하경 대기자 김건희 여사 명품백 수수 의혹이 세계의 뉴스가 됐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지난주 ‘2200달러짜리 디올 손가방이 한국의 여당을 뒤흔들고 있다’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영국 BBC방송과 더 타임스, 텔레그래프도 이 사안을 보도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국민이 걱정을 할 만한 부분이 있다”고 한 뒤 여당과 대통령실 간에 불협화음이 있었다. 사과를 요구하는 민심에 윤 대통령이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 주목된다. 윤 대통령을 아끼는 지기(知己)가 대신 반성문을 써서 전해주려 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제왕적 대통령의 시련에는 예외가 없는 것일까.     ■  「 일본은 신 같은 천황 권력도 제한 한국, 심부름꾼을 전제군주로 모셔 윤 대통령 ‘명품백 수수’ 대응 주목 지기는 대신 반성문 써준다는데… 」    한국이 대통령제를 채택하게 된 것은 초대 국회의장 이승만의 고집 때문이었다. 1948년 5월 31일 구성된 제헌국회는 열여섯 차례의 헌법 기초위원회 회의를 갖고 6월 21일 내각제 헌법 초안을 확정했다. 당대 최고의 헌법학자인 유진오가 주도했기에 속전속결로 끝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대통령 임기 동안 정부가 안정된 상태에 있어야 한다”며 대통령제로 바꾸자고 했다. 한민당 당수인 김성수가 동의했고, 동경제대 법학부 출신인 김준연이 연필로 관련 조항 몇 대목을 고쳤다. 유진오는 “기형적 정부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렇게 해서 다음 날 대통령제 헌법안이 본회의에 넘겨졌고, 7월 12일 통과됐다.   유진오 헌법안은 독일 바이마르 헌법을 참고했다. 루소의 사회계약설을 토대로 자유·평등·복지가 구현되는 국민주권적인 민주국가를 지향했다. 경제적, 사회적 민주주의까지 보장하는 진보성도 갖췄다. 하지만 핵심인 권력구조가 내각제에서 대통령제로 급변침한 것은 민주주의 역사를 퇴행시키는 출발점이 되고 말았다. 아홉 차례의 개헌을 거친 한국 특유의 제왕적 대통령제는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 됐다. 대통령 한 사람에게 권력을 몰아줘 신속하고 효율적인 정책 결정과 집행을 가능하게 했고, 고도성장을 뒷받침한 장점도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다원적 가치와 민의에 역행하는 시대착오적 전제군주를 복제하는 위험한 구조를 만들고 말았다.   일본의 제헌 과정은 오랜 시간 숙성 과정을 거쳤다. 1880년이 되자 헌법을 만들고 의회를 열자는 자유민권운동이 일어났다. 눈이 밝은 메이지 정부 최고 실력자 이토 히로부미는 이미 1871년부터 서양 헌법 서적을 입수해 연구하고 있었다. 그는 1880년 12월 원로원이 작성한 헌법안에 대해 “서양 각국의 헌법을 모아서 베낀 것이며 일본의 국체와 사람에 대해서는 조금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혹독하게 비판했다. 원로원 안은 폐기됐다. 이토는 1882년 3월 입헌군주제의 원산지인 유럽으로 떠났다. 독일 헌법 전문가 모세의 강의를 들었다. 오스트리아 빈 대학 슈타인 교수로부터는 헌법으로 군주권을 제한하는  군주기관설을 배웠다. 19세기 전반 유럽 시민혁명의 영향을 받아 등장한 최첨단 헌법이론이었다. 영국 런던에서도 입헌군주제 운용의 구체적 현실을 점검했다. 1년5개월 만에 귀국했다.   1885년 45세에 초대 총리가 된 이토는 열한 살 어린 메이지 천황이 “실권 없는 로보트 취급을 당한다”는 불만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됐다. 실제로 천황은 각료들이 국사를 상주(上奏)하려 해도 만나지 않고 사보타주했다. 이토는 천황을 소년시절부터 모신 동갑내기 시종 후지나미를 슈타인 교수에게 보내 2년3개월간 강의를 듣게 했다. 헌법을 몰랐던 말(馬) 전문가 후지나미는 귀국해 천황과 황후에게 33시간 동안 헌법과 입헌군주의 역할을 강의했다. 일본에 군주기관설을 적용하기 위한 치밀한 작업이었다.   이토는 1888년 총리에서 물러나 초대 추밀원 의장으로 제헌 작업에만 몰두했다. 이노우에 고와시가 만든 초안을 놓고 식사도 걸러가면서 밤늦게까지 토론했다. 젊은 관료들은 전직 수상의 의견을 정면으로 공격하기도 했다. 이토가 “자기 의견을 마음껏 말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1889년 2월 11일 메이지 헌법이 공포됐다(『이토 히로부미』 이토 유키오).   두 나라가 헌법을 제정하는 과정은 이렇게 달랐다. 일본은 현인신(現人神)인 천황의 권한을 축소시켰다. 한국은 거꾸로 심부름꾼인 공복(公僕)에게 전제군주의 지위를 부여하는 단초를 만들었다. 일본은 정교하게 설계된 입헌군주제로 근대화에 성공했다. 이토는 조선 병탄(倂呑)의 원흉이었고, 안중근 의사에게 처단됐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영웅이었다. 반면에 한국 국민은 제왕적 대통령제로 고통받고 있다.   이 나라는 대통령 한 사람이 바뀌면 정부와 민간 기업, 범부(凡夫)의 일상까지 집단 몸살을 앓는다. 일류 기업과 한류의 파워로 국가 위상은 올라갔는데 언제까지 이런 전근대적인 제왕적 대통령제 아래서 악순환을 겪어야 하는 것일까. 정치권도, 국민도 시대의 흐름에 부합하는 건강한 권력구조를 만드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이다. 이하경 대기자

    2024.01.29 00:28

  • [염재호 칼럼] 인본주의 시대에서 물본주의 시대로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새해가 밝았다. 이제 인류는 본격적으로 문명사의 대전환기를 맞고 있다. 인간이 만든 데이터 시스템에 의해 인공지능이 우리의 삶을 바꿔놓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이후 인간 중심의 인류 문명사가 사물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문명사로 서서히 전환되고 있는 순간이다.   천 년 이상의 중세 암흑기에 유럽인들은 하나님이 삶의 중심이 되는 신본주의(神本主義) 시대를 살았다. 인간의 삶은 오로지 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삶이었다. 유럽 전역을 지배하던 로마가 서기 313년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의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 국가로 변화하면서 중세 유럽은 신이 중심이 된 사회로 바뀌었다. 하나님을 위해 대규모 성당을 건축하고 교황의 권위는 황제의 세속적 권위를 능가하곤 했다. 신이 모든 삶의 중심인 신본주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  「 디지털 사회로 인류문명 대전환 사물이 인간을 규율하는 시대로 인본주의 쇠퇴와 인공지능 확산 인간 주체성과 존엄성은 지켜야 」    이런 신본주의가 인간이 발명한 금속활자와 인쇄술의 발전으로 종교개혁, 르네상스, 시민혁명을 거치면서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 되는 인본주의(人本主義) 사회로 바뀌었다. 삶의 중심이 신이 아니라 인간으로 돌아왔고 인간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천부적 인권을 갖게 되었다. 인본주의는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할 수 있는 정당성의 논리도 제공해주었다. 산업혁명으로 인간의 과학지식이 발전하고 20세기 들어서 대량생산체제가 확립되면서 풍요로운 대량소비의 시대가 가능하게 되었다.   하지만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 되는 인본주의는 인간 탐욕을 부추겨 지구 생태계가 위협받게 되었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화석연료 남용으로 기후위기가 나타나고 넘쳐나는 쓰레기로 환경이 파괴되었다. 매년 약 600억 마리의 닭, 26억 마리의 오리, 15억 마리의 돼지, 5억 마리의 양, 4억 마리의 소가 식량으로 도축된다.   이제 다른 동물이나 물체를 객체로 지배하던 인간 중심의 삶에 변화가 일고 있다. 애완견(愛玩犬)이 반려견(伴侶犬)의 지위에 올라섰다. 한 온라인 쇼핑몰에서 지난해 반려견의 유모차인 소위 개모차가 어린아이 유모차 구매량을 57% 대 43%로 추월했다고 한다. 동물보호 차원에서 육식을 거부하는 채식주의가 늘어나고 동물학대는 아동학대 못지않은 심각한 범죄행위로 여겨진다.   언어 표현에서도 객체인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이들을 주체로 대접하여 능동태 서술어를 활용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신문이나 TV의 편집 지침에서도 모든 객체의 “된다”라는 표현을 “한다”로 바꾸게 한다. 자연현상인 “폭풍이 확산된다”를 “폭풍이 확산한다”로, “문제가 악화되면”을 “문제가 악화하면”으로, “금리인하가 지속된다”를 “금리인하가 지속한다”로 바꿔 쓰도록 한다. 객체도 주체로 인식해야 한다는 주장이 알게 모르게 인간중심 인본주의를 서서히 침몰시키고 있는 것이다.   2023년은 인류가 인공지능(AI)으로 새로운 문명사를 써내려가는 출발점이 되었다. 2022년 생성형 인공지능인 챗GPT 3.5 출현 5개월 만에 GPT 4가 등장하여 본격적인 인공지능 시대에 돌입하게 된 것을 인류는 깨닫기 시작했다. 올해 CES나 다보스 포럼에서도 인공지능이 모든 주제를 석권했다.   이제 스마트폰이 없으면 일상생활이 거의 불가능해진다. 인간이 주체적인 삶보다 사물에  의해 지배받는 삶을 살고 있다. 먹고 마시고 물품을 구매하는 행위가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매개로 한 정보에 의해 이루어진다. 보고 싶은 책이나 영화도 우리의 이전 행위를 분석한 자료에 의해 추천되고 유도된다.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도 가짜뉴스로 유포되는 정보를 그럴듯하다고 판단한다. 유튜브나 SNS로 보고 싶고 듣고 싶은 내용만 반복적으로 보고 듣다 보면 인간은 자신의 판단능력이 상실된 채 자기도 모르게 세뇌되어 확증편향에 빠져버리게 된다.   올해 미국 대통령 선거나 우리나라 총선에서도 이런 현상에 크게 영향을 받을 것이 틀림없다. 이제 인공지능이 모든 것을 판단하고 인간의 삶을 지배하게 될 때 인간 본연의 주체적 삶은 점점 상실될 것이다. 마치 객관적 진실처럼 보이는 여론조사, 뉴스, 다른 사람들의 행동양식, 상업주의 광고 등과 같은 객체들에 의해 주체인 인류의 삶이 지배되는 물본주의(物本主義)로 서서히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신본주의 시대의 정치체제인 군주제가 인본주의 시대가 되면서 투표선거제에 의한 민주주의로 바뀌었다면, 빠른 미래에 물체인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정치체제가 등장할지 모른다. 인간의 주체적 판단보다 객체인 인공지능의 판단이 더 뛰어나고 효율적이라고 믿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동물이나 객관적 현상에게 주체의 자리를 내어주는 것을 넘어서 이제는 인공지능에게 주체의 자리를 내어주는 물본주의 현상이 가속화될 것 같아 씁쓰름한 한 해의 시작이다. 하지만 인본주의 시대에도 신을 믿는 믿음이 사라지지 않았던 것처럼 물본주의 시대가 되어도 인간의 주체성과 존엄성은 유지되면 좋겠다.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2024.01.24 00:30

  • [최훈 칼럼] ‘강제 당론 투표’ ‘제왕적 당대표’ 폐지가 정치 혁신이다

    최훈 주필 총선 79일 앞의 예비후보들이 ‘금배지’ 꿈에 부풀어 뛰고 있다. 각자의 사회적 성취를 토대로 국가·국민을 위해 선량을 해보겠다는 멋진 포부와 열정을 응원하고 싶다. 현실은 그러나 참담하다. “강경파가 박수부대를 동원해 의원총회에서 밀어붙인다. 수시로 당론을 정해 안 따라가면 가차 없이 징계다. 강제 당론이 일상이다. 당대표까지 공천권을 갖고 횡포 부리니 줄을 설 수밖에 없다. 국회의원 왜 하냐고…. 그냥 한 번 더 하기 위해서가 유일한 목표들이다.”     ■  「 의원 소명은 오로지 국익 위한 양심 거대정당 당론 강압, 의원 영혼 말살 공천권 횡포 당 대표직 하등 불필요 철폐 없인 어떤 정치 개혁도 공염불 」    민주당을 탈당한 조응천 의원의 ‘초선 4년’ 토로다. 정치가 왜 이 모양인지 정곡(正鵠)을 짚었다. 야도, 여도 크게 다를 건 없다. ‘인재 영입’이다, ‘새 피 수혈’이다 마술피리에 홀려 따라간 의원들은 총선 다음 날부턴 영락없는 거대 정당의 노예 신세다. 짧은 79일의 유권자 상전 노릇이 끝나면 국민도 거대 정당 밑 노예의 길 시작이다. 지금의 총선은 후보·정당·국민 3자의 ‘노예계약서’ 서명식일 뿐이다. 영원한 악순환이다.   주범은 ‘강제적 당론 투표’와 ‘제왕적 당대표’다. ‘국회의원은 국가 이익을 우선하여 양심에 따라 직무를 행한다’(46조2항)고 헌법은 적시했다. “선출된 의원이 선거구민, 정당 및 이익단체 등의 특수이익이 아니라 전체 국민을 위한 국가이익을 추구하도록 보장한 자유 위임의 원칙”이라고 헌법재판소는 2019년 해석했다. ‘전체 국민을 위한 국가이익’만이 ‘양심’이다.   현실은 거꾸로다. 지난 연말 쌍특검법안 통과를 보자. 야권 183명 투표에 ‘50억 클럽’ 특검은 183명 찬성, ‘김건희 여사 특검법’은 182명 찬성. 그 찬반 논리를 차치하고, 21세기 대낮에 무슨 ‘북한식 투표’ 느낌이다. 당론에 따른 투표 추종도와 자기들끼리의 정당 단합도는 우리가 세계 최고 수준일 터다. 물론 여당 역시 당론으로 투표 전 퇴장했으니 크게 할 말도 없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 체포동의안에 대한 당내 이탈표에 ‘개딸’들의 ‘수박 색출’ 난동 역시 같은 맥락.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스스로 예종하는 풍토가 생긴 건 가장 슬프다. 당대표 경선 당시 여당 초선의원 50여 명이 ‘나경원 비난’ 연판장을 돌리며 용산에 주파수 맞춘 장면은 ‘영혼 소멸’의 상징이다. 영혼들이 없어지니 민주당의 가장 보수적 의원과 국민의힘의 가장 진보적 의원 사이, 즉 중도온건파는 모두 멸종이다. 민주적인 당내 토론도 함께….   당론 강제는 우리 의회를 심각한 위헌·위법적 상태로 만들었다. 국회는 국가의 기구다. 정당은 사적 결사체일 뿐이다. 정당법 2조는 “정책 추진, 공직선거 후보자 추천, 국민의 정치적 의사 형성이 목적인 국민의 자발적 조직”으로 정당을 규정한다. 자발적 결사체가 국가 기구인 국회의원들의 의사를 강제 구속하는 게 바로 위헌·위법적이다. 어느 법률에도 “국회의원이 소속 정당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규정은 없다.   다른 암 덩어리, 제왕적 당대표다. 모든 분란·갈등의 진원이다. 박정희 시대와 군부 정치, 3김 시대의 극한 대결 속에 강력한 자기 진영 통제를 위해 만든 제도가 당 총재다. 스스로는 당권을 징검다리 삼아 차기 대권을 노린다. 그리 하려니 모든 공천권과 당직 인사, 자금 루트를 거머쥐며 의원들을 꼭두각시로 만든다. 용산이 억지로 만든 김기현 당대표의 블랙코미디 경선, 한 틈의 대선 패배 성찰도 없이 당대표로 직행, 방탄 사당화 논란을 자초한 이재명 대표의 사례를 보라. 당대표 만들어 이익 공유를 꾀했던 게 송영길 캠프의 경선 돈봉투 살포 아닌가. 하등 쓸모없는 옥상옥 계륵(鷄肋), 당대표다.   미국처럼 의원들이 선출한 여야 원내대표가 독립적인 의회의 입법·정책을 주도해 가면 될 뿐이다.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 역시 야당 대표가 아니라 입법부 소속인 여야의 원내 지도부와 정책을 협치해 가면 될 터다. 평소 국고보조금·후원금 등을 관리하다 선거나 전당대회 즈음 공정한 후보 경선의 룰과 과정을 관리해 주는 미국 정당의 ‘전국위원회(National Committee, 공화당 RNC, 민주당 DNC)’ 정도 느슨한 조직이면 충분하다. 인사 청탁과 민원 창구일 뿐인 지역구 당협(지구당) 또한 선거 때의 한시적 자원봉사 조직이면 족하다. 당대표 눈도장 찍으러 몰려다닐 시간, 의정에 충실토록 하자. 당론 추종과 충성심만을 공천 잣대 삼는 건 망국의 지름길이다. 물론 꼼꼼하게 의정 성과를 계량해 공천에 반영할 데이터 시스템이 선행돼야 한다. 정치 신인 충원을 위해선 당원만이 아닌 지역 주민들의 여론, ‘새피’ 들의 사회적 기여도를 객관적으로 평가해 줄 새 시대의 공천 시스템이 나와야 할 시간이다.   “천국에 가더라도 정당과 함께라면 가지 않겠다”(토머스 제퍼슨)는 비유처럼 우리 공룡 정당들은 극한 혐오의 대상이 된지 한참이다. 후보들에게 “불체포 특권 포기” “금고 이상 시 세비 반납” 등 갑질만 해댈 게 아니다. 쇄신의 대상은 바로 그 거대한 기득권 정당과 그 당의 제왕들이다. 강제 당론 투표, 전횡 일삼는 당대표직을 없애겠다고 국민에게 공약하라. 그것만이 진정한 정치 교체다. 그런 혁신에 표를 주고 싶다. 최훈 주필

    2024.01.22 00:24

  • [이하경 칼럼] 민심을 이기는 권력은 없다

    이하경 대기자 힘센 사람이 권력에 취하면 판단이 흐려진다. 윤석열 대통령은 부인 김건희 여사 주가조작 특검법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60%가 넘는 반대 여론과 충돌하고 있다. 대통령실은 “총선용 여론 조작 법안”이라고 주장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국민의 불쾌한 감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이 가족을 위해 거부권을 행사한 전례는 없었다. “위헌적 권한 행사”라는 야당의 서늘한 주장이 어쩐지 예사롭지 않다.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차남 김현철 때문에 몰락했다. 대선 일등공신 김현철은 안기부와 청와대에 심복을 두고 막강한 정보력으로 권력을 휘둘렀다. ‘소통령’의 전횡을 YS에게 직보(直報)한 박관용 비서실장은 반격을 당해 바로 힘을 잃었다. 김현철의 특급 참모는 김기섭 안기부 운영차장이었다.     ■  「 윤 대통령, 배우자 문제로 시험대 정치 9단 양김도 아들 관리 실패 특별감찰관이 모든 의혹 조사를 대통령·배우자 일정도 공개해야 」    1997년 김기섭 파문으로 시끄러울 때 노신영 전 총리를 만나 소회를 들었다. “안기부에서는 매일 수천 건의 정보와 첩보가 생산된다. 그중 5건만 부장에게 올라온다. 2년8개월 동안 부장으로 있으면서 대통령 한 사람에게만 보고했다.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내용이다. 김기섭은 권한 없는 대통령 아들에게 매일 보고했다. 명백한 국정농단이다.”   김현철은 한보게이트의 몸통으로 지목돼 검찰 조사를 받았지만 무혐의로 풀려났다. 그러나 여권과 검찰 수뇌부는 서울대 교수들이 4·19 혁명 때처럼 시위에 나설 거라는 보고를 받고 당황했다. 검찰은 서둘러 별건수사에 나섰고, 조세포탈이라는 금시초문의 죄명을 적용했다.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한 편법이었다.   김현철은 검찰 재소환을 앞두고 아버지에게 “이틀 조사받고 인사드리러 가겠습니다. 걱정 마세요”라고 했다. 그러나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있는 YS는 “미안하다. 내가 힘이 없다”고 했다. 김현철은 이틀 뒤인 1997년 5월17일 현직 대통령의 아들로는 최초로 구속됐다. YS를 만나고 나온 신상우 전 해수부 장관은 “대통령이 넋이 나갔다”고 했다. 정상적인 국정 운영을 할 수 없었고, 결국은 IMF 외환위기 사태가 터졌다.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장남 김홍일은 정치적 동지였다. 김홍일은 심한 고문 후유증으로 파킨슨병을 얻었고, 언어 소통이 원활하지 않았다. 그러나 DJ 집권 이후 단숨에 권력 실세가 됐다. 박주선 법무비서관은 초대 내각 각료 명단을 발표하기 위해 걸어가는 도중 DJ의 전화를 받았다. “나 때문에 고문당해 불구가 된 아들의 부탁이오….” 장관 한 사람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조승형 헌법재판관의 국정원장 기용이 은밀히 검토됐을 때 밤늦게 김홍일의 동교동 자택 문을 두드린 적이 있다. 자다가 일어난 그는 “없던 일이 됐다”고 화끈하게 확인해 주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견제를 많이 받아서 청와대에 들어가지 않지만 돌아가는 건 다 안다.” 다른 취재로 그의 집을 방문했는데 인사 청탁을 하는 방문객의 목소리가 방 안에서 흘러나왔다. 인기 트로트 가수도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통령 아들의 영향력은 전방위적이었다.   당시 대통령 친인척과 가족을 관리하는 민원비서관은 김홍일의 30년 친구였다. 허술한 감시는 비극을 불렀다. 김홍일은 권력형 뇌물비리로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돼 의원직을 잃었다. DJ의 다른 두 아들은 재임 중 구속됐다. 분노한 민심 앞에서는 검찰도 이들에게 총구를 들이댈 수밖에 없었다.   누구보다 민심을 잘 읽었던 ‘정치 9단’ YS·DJ도 이렇게 자식 관리에 실패했고, 임기 말에 눈물 흘렸다. 윤 대통령은 임기를 2년도 채우기 전에 고난의 시험대에 올랐다. 가혹한 운명이지만 어찌 보면 차라리 잘된 일이다. 조기에 민심을 수용하면 남은 기간의 국정 운영은 순항할 수 있다.   윤 대통령은 당당하게 특검을 받겠다고 나왔어야 했다. 공정과 상식을 내걸고 당선된 승부사 대통령의 모범답안이었다. 이제라도 민심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파격적인 결단을 내려야 한다. 제2부속실을 설치해 배우자를 관리하기로 한 것은 잘한 결정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대선 공약대로 특별감찰관을 임명하고 해외순방 중 김건희 여사 명품 쇼핑, 명품백 수수, 인사청탁, 서울~양평 고속도로 노선 변경 등 배우자 관련 의혹을 빠짐없이, 철저하게 조사해야 한다. 문제가 드러나면 일벌백계하고 대국민 사과와 합당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내친김에 대통령과 배우자가 언제 누구를 만났는지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무성했던 루머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대통령이 민심에 맞서거나 마지못해 따라가는 시늉만 하면 안 된다. 하늘의 그물은 커서 성긴 듯하지만 결코 빠뜨리는 법이 없다(天網恢恢 疎而不漏, 노자 도덕경). 선행도, 악행도 언젠가는 다 드러나게 되어 있다. 마음을 내려놓고 하늘 같은 국민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 국민의 존경을 받았던 YS·DJ조차 피할 수 없었던 비극적 운명을 반복하지 않는 길이다. 끝까지 민심을 이기는 권력은 없다. 이하경 대기자

    2024.01.08 00:42

  • [고현곤 칼럼] 육영수 여사가 생각나는 새해 아침

    고현곤 편집인 1968년 7월 3일 밤.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 물난리가 났다. 잠원동 주민 300여 명이 신동초등학교에 긴급 대피해 있었다. 그때 한 사람이 폭우 속에 황토물 교정을 철벅철벅 걸어오고 있었다. “이 밤중에 누굴까?” 그는 교사 안으로 들어오며 머리를 감쌌던 흠뻑 젖은 수건을 벗었다.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사님 아냐?” 누군가 놀라 소리쳤다. 육영수 여사는 “여러분 얼마나 고생 많으세요”라고 인사한 뒤 가져온 구호 물품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나룻배를 타고, 발목까지 빠지는 흙탕길을 고무신 차림으로 걸어서 그곳까지 온 것이다.   그해 호남은 극심한 가뭄을 겪었다. 현장을 찾은 육 여사는 논두렁길로 걸어갔다. 말라 타버린 논 구석에 양수기가 있었다. 올라서서 양수기를 밟기 시작했다. 흙먼지가 뒤덮인 빈 양수기가 쩍쩍 소리를 냈다. 그를 발견한 동네 사람들이 다가갔다. 육 여사는 울먹이며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이 사람들을 어떡하지….”   육 여사는 소리소문 없이 봉사와 선행에 힘썼다. 보육원, 양로원 등 사회의 그늘진 곳을 보살폈다. 67년 말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열린 정부·여당 송년회에 육 여사가 불참했다. 의아해하는 참석자들에게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 집사람은 보육원에 가느라 못 왔다”고 실토하는 바람에 모두 아무 말을 못 했다. 육 여사가 만든 사회봉사단체 양지회는 전국 87개 나환자촌 지원의 대명사였다. 그는 한센인들을 찾아가 손을 덥석 잡고, 고구마를 나눠 먹으며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   육 여사는 검소했다. 이애주 전 의원의 증언. 육 여사가 흉탄에 스러진 74년 8월 15일 서울대병원 간호사였다. “서거하신 후 유품을 정리하는데, 글쎄 한복 속옷을 기워 입으셨더라고요. 알뜰하고 소박한 성품을 생각하며 유품 앞에서 다시 울음바다가 됐습니다.” 남들이 화려한 자리라고 부러워하는 대통령 부인이지만, “청와대는 항상 중류 살림을 하자”며 근검절약을 생활신조로 삼았다. 비싼 옷을 입는 일이 없었다. 청와대에는 그 흔한 꽃꽂이도 못 하게 했다. 박 대통령은 육 여사 서거 후 이렇게 회고했다. “살아생전 자신의 사사로운 욕망을 채우기 위한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는데….”   당시에는 다들 가난하게 산 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도 사람 나름이다. 비슷한 시기, 필리핀 독재자 마르코스 대통령의 부인 이멜다는 사치 행각을 벌였다. 명품 구두만 3000켤레가 넘었다. 육 여사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사치를 부릴 수 있는 절대권력의 부인이었지만.     ■  「 한복 속옷을 기워 입을 정도로 검소 권력 누린다는 원성 살까 봐 늘 조심 조용히 봉사 선행, 온 국민 존경받아 육 여사 같은 영부인 또 볼 수 있을까 」  그는 사려 깊고 겸손했다. 가수 이미자씨 레코드판 한 장을 산 것이 알려진 후 가게에 들른 적이 있었다. 한 직원이 “영부인님, 이것도 사주세요”하고 물건을 내놓았다. 육 여사가 “근혜 엄마라고 하면 몰라도 영부인이라고 하니까 깎지도 못하겠네요”라고 말해 주위 사람들을 웃긴 적이 있다. 김두영 전 청와대 2부속실 비서관의 증언. “육 여사는 권력을 즐기는 행세로 국민의 원성을 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늘 조심했다. 오만하게 보일까 봐 행사장에서 의자에 등을 기대지 않을 정도였다.”   나설 때와 물러설 때를 알았다. 국가의 대소사와 인사는 대통령의 영역이라 판단해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대신 소소한 민원 처리는 자기 일이라고 여겼다. 매일 50여 통의 민원 편지를 뜯어보고 답장하는 일을 거르지 않았다. “내 앞으로 온 편지는 절대 손대지 마라”고 하고, 민원을 직접 챙겼다. 도봉동 토굴 속에 산다는 어느 소년의 편지를 읽고는 주소도 모르는 그곳 일대를 직접 뒤졌다. 기어이 소년을 만나고는 아이스크림 장사에 필요한 장사 밑천을 대준 일도 있었다.   잡음이 나지 않도록 주변을 늘 단속했다. 청와대 내 야당을 자처해 대통령이 알아야 할 일은 직접 전달했다. 한 번은 박 대통령 친척이 운전하다 사망사고를 냈다. 다들 쉬쉬하고 덮으려고 했는데, 육 여사가 그 소식을 대통령에게 전하는 바람에 그 친척은 구속됐다. 김종필 전 총리는 회고록에 “국민에게 퍼스트레이디란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인지 처음으로 알린 분”이라고 평가했다.   박 대통령에게 저항하던 사람들도 육 여사의 인품에는 고개를 숙였다. 70년대 민주화 운동의 정신적 지주였던 김수환 추기경은 육 여사 영결식에서 이렇게 기도했다. “그분이 우리 마음에 심은 평화와 사랑의 씨가 자라 그 꽃을 피우게 해 달라.” 김 추기경은 훗날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에 “국모(國母)라는 칭호를 받을 만한 분”이라고 썼다. 서슬 퍼런 독재 시절, 박 대통령의 철권(鐵拳) 이미지를 육 여사가 절묘하게 보완한 셈이다. 서거한 74년을 기점으로 박정희 정권이 서서히 무너진 건 우연이 아니다.   그 뒤 대통령 부인이 여럿 나왔다. 이희호 여사처럼 평생 민주화에 헌신한 훌륭한 분도 있었다. 하지만 육 여사만큼 온 국민의 존경을 받으며 품격 있게 대통령 부인 역할을 잘 해낸 인물은 없는 것 같다. 그 어느 때보다 육 여사가 생각나는 2024년 새해 아침이다. 고현곤 편집인

    2024.01.02 03:09

  • [최훈 칼럼] ‘퍼스트레이디 스트레스’ 해소하고 가야

    최훈 주필 덕담 나눠야 할 새해 아침이다. 하지만 에두를 필요도 없이 정국은 혼돈의 블랙홀 속이다. 그 중심은 야권이 단독 통과시킨 ‘대통령 배우자 김건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 임명 등에 관한 법률안’이다. 대통령실은 “이송 즉시 거부”다. 민주당·정의당이 정권의 아킬레스 건이라 본 김건희 여사를 고리로 치명타를 가하려는 총선용 전략 카드임은 분명하다.   사실 2009~2012년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의 디테일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별로 알고 싶지도, 중요하지도 않다는 분위기다. 그럼에도 국민의 특검 찬성 여론은 매우 높다. 67%(서울경제)~70%(국민일보)가 거부권 반대다. 한동훈 비대위원장의 여당은 ▶야당만의 특검 추천 ▶수사 브리핑 허용 ▶총선 전후의 조사 시점을 들어 “국민 선택권을 침해하는 악법”으로 규정한다. 검사 출신답게 법규 해석에 초점을 맞춘 접근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국민의 70%는 과연 앞뒤 분간 못하는 바보일까. ‘법 해석’과 ‘국민 정서’의 사이. 상황은 왜 이리 흘러온 걸까.   윤석열 대통령은 “50살이 다 돼서 아내 만나 결혼(2012년)한 것”을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꼽았다. 그러나 대선후보 시절부터 아내의 사건들로 마음고생을 해야 했다. 학력·경력 부풀리기 등으로 대국민 사과에 나선 김 여사는 “깊이 반성하고, 국민 눈높이에 어긋나지 않도록 조심하겠다”며 “남편이 대통령이 돼도 아내의 역할에만 충실하겠다”고 고개를 숙였었다.   그에 앞선 2021년 여름, 검찰총장에서 물러난 야인인 윤 대통령의 국민의힘 입당을 권하려고 서초동 아크로비스타 자택에 적잖은 정치인이 들렀다. 당시 이들이 고개를 꺄우뚱거리며 전해 준 얘기가 있다. “입당을 권유하자 옆 의자에 앉아 있던 김 여사가 ‘우리가 입당하면 저를 보호해 주실 수 있나요’라 하더라. ‘우리’ 라는 단어가 유독 기억에 남더라.” 다른 인사가 전한 장면. “바로 옆 김 여사가 ‘오빠는 (정치에 대해선) 잘 모르니 (이 분이) 시키는 대로 하세요’라 하더라.” 당시 ‘아크로비스타의 기억’은 여당 관계자들의 이런 해석을 낳았다. “김 여사 스스로는 윤 대통령의 오늘이 있기까지 적잖은 기여의 지분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더라. 정치적 창업 동업자쯤 여길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김 여사는 대선 직전 공개된 한 불법도청 녹음에선 “우리 남편은 완전 바보다. 내가 다 챙겨줘야지 뭐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했었다. 하긴 모든 아내에게 남편들은 바보일 수도 있겠으니….     ■  「 김 여사 특검법, 총선용 공세 맞지만 ‘찬성 70%’ 여론의 이유도 성찰해야 사과, 특별감찰관제 등 제도 정비로 국민 납득할 ‘문제해결’노력이 우선 」  우리의 법엔 ‘대통령 부인’의 권리·책임·의무 규정이 없다. 이리 보면 공인, 저리 보면 사인이니 경계선에서 문제가 생길 수밖엔 없다. 이 정권 들어 “그 문제는 내게 맡겨 달라”는 대통령의 의중 따라 특별감찰관제나 제2부속실 등의 관리 시스템도 없었다. 그러니 사달이 이어진다. 2022년 6월엔 코바나컨텐츠 임직원 3명이 김 여사의 봉하마을 일정에 동행, 참배해 클릭이 몰렸다. 그중 한 명이 “무속인 같다”는 게 출발이다. 사실이 아니었지만 무슨 법사나 무속의 얘기가 끊이지 않던 탓에 대중의 트라우마가 되살아난 사건쯤이다. 그중 한 명은 대선 기간 논란이던 ‘개 사과’ 인스타그램을 올린 이였다.   지금껏 구설은 끊이지 않아 왔다. ‘김건희 라인’이란 인사 논란이 해외 출장의 행사 의전·홍보 등을 담당하는 대통령실 내부에서 불거져 나왔다. 김 여사가 여당 여성 의원들을 초청한 관저에선 한 영남 의원이 “오늘 온 여성 의원들은 다 공천되도록 여사께서 배려해 달라”고 농반진반 얘기를 꺼내, 관계자들이 “쉬쉬”에 애먹기도 했다. 대통령의 나토 순방 기간 중 리투아니아 언론은 김 여사가 경호원·수행원 등 16명과 나서던 중 명품 편집매장에 들른 사실을 보도, 야권의 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그 두 달 뒤 재미교포 친북 목사에게 디올 백을 받은 건 아무런 변명의 여지가 없는 과오였다. 물론 불법 녹음의 덫에 경계와 긴장도 풀어졌을 터다. 하지만 유튜브에 뜬 당시 대화는 대통령 부인의 격(格)과 역할의 선(線)은 어디인지 심각한 성찰을 낳게 했다. “제가 이 자리에 있어 보니까 정치는 다 나쁘다고…” “저에 대한 관심이 끊어지면 제가 적극적으로 남북 문제에 나설 생각” “남북통일을 좀 해야 되고, 우리 목사님도 한번 크게 저랑 같이 할 일 하시고….”   내용도 잘 모르는 여사 특검법안의 ‘찬성 70%’는 바로 퍼스트레이디에 대한 국민의 스트레스 지수인 듯싶다. 늘 조마조마한 국민의 우려와 걱정을 해소해 달라는 주문이기도 하다.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할 특별감찰관제를 도입, 아예 야권이 추천하라고 하는 건 어떨까. 국가기밀 접근권을 제한한 제2부속실의 공적 울타리 안에서 여사가 떳떳하게 활동할 순 없는가. 무엇보다 디올 백 수수 만은 정중히 사과해야 옳다. 보수 진영에서조차 요즘 ‘6·29선언급 쇄신’만이 살길이라 한다. 한동훈 위원장 앞의 가장 높은 허들, ‘고양이 목 방울 달기’다. 최훈 주필

    2024.01.01 02:54

  • [염재호 칼럼] 국격과 외교부총리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2023년 한 해가 저물어간다. 올 한 해 국민의 많은 관심을 모으며 윤석열 정부가 혼신의 힘을 기울인 일은 아마 부산엑스포 유치였을 것이다. 대통령, 국무총리, 부산시장뿐 아니라 4대 그룹 총수와 CEO들이 총동원되어 182개 회원국을 대상으로 부산엑스포 유치활동에 전력을 기울였다. 엑스포 민관합동 유치위원회 위원들의 활동을 합치면 지구를 496바퀴 돌 정도였다고 한다. 재계 리더와 경영진이 175개국 3000여 명의 정상과 장관을 만나기 위해 이동한 거리만도 지구를 197바퀴 돌 정도라고 한다.     ■  「 엑스포 유치 실패, 외교력 부족 탓 국격 걸맞게 외교 역량 강화해야 피크 코리아 늪 탈피 위해서라도 부총리급 세계 전략 사령탑 필요 」    아라비아 반도와 걸프만 지역 종주국인 사우디아라비아는 아랍에미리트(UAE)의 2020엑스포 유치와 카타르의 2022월드컵 유치로 자존심이 상해 2030 엑스포 유치에 필사적이었다.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는 막강한 오일머니의 자금력을 앞세워 엑스포 유치에 전력을 기울였다. 늦게 출발했지만 우리도 약 60개국에서 지지 약속을 받아냈다면서 마치 서울올림픽과 한일월드컵 유치와 같은 성공신화를 믿었는지 모르겠다. 결과는 165개국이 참가한 1차 투표에서 사우디 리야드 119표, 대한민국 부산 29표, 이탈리아 로마 17표로 참패를 당했다.    K팝, K드라마의 인기를 앞세워 최종 프레젠테이션도 해 보았지만 외교력에서 사우디의 벽을 넘지 못한 것이다. 단순히 자금력 때문이라고 보기에는 외교적 역량이 떨어진 부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세계 3대 메가 이벤트 중에서 스포츠 중심인 올림픽과 월드컵과 달리 경제와 문화 올림픽이라고 할 수 있는 엑스포는 외교력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외교현장에서 우리의 국격은 경제력만큼 높지 않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미국, 중국, 일본 등 강대국의 외교 전략에 수동적으로 대응하면서 우리 나름의 외교 역량을 키우지 못했다. 사회주의국가 출신 주한 대사들이 종종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는 것을 보고 놀라곤 한다. 우리 외교관은 영어만 주로 하고 주재국 언어를 못하는 경우도 많다. 중국이나 일본 같은 주요국에서 정치권 인물이 대사로 임명되면 중국어나 일본어를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우리나라는 수출주도형 경제로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 되었다. 하지만 외교력은 10위권에 한참 못 미친다. 2022년 우리나라는 GDP 1조 6732억 달러로 세계 13위에 올랐다. 네덜란드는 9919억 달러로 18위를 차지했다. 제국의 경험이 있는 네덜란드는 강소국 외교를 잘 보여준다. 우리나라 해외공관은 116개이지만 네덜란드는 129개의 공관을 갖고 있다. 공적 원조인 ODA 예산도 2022년 네덜란드는 65억 달러지만 우리나라는 29억 달러로 절반에도 못 미친다.   미·중 갈등 심화로 글로벌 밸류 체인이 붕괴하고 국제질서가 새롭게 태어나려 한다. 중국과 러시아가 힘을 합치고, 이들의 아프리카에 대한 원조와 투자는 매우 적극적이다. 우리도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중남미, 중동, 동유럽 국가들에 대한 전략적 접근이 필요한 시점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외교부의 지위와 역량은 매우 초라하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국가 경제를 총지휘하던 경제기획원의 전통이 이어져 기획재정부장관이 경제부총리의 역할을 맡고 있다. 교육부 장관도 사회부총리를 겸하고 있다. 통일부와 과학기술부의 장관도 부총리를 겸직했다. 하지만 우리 경제의 핵심이 수출이고 강대국에 둘러싸여 외교가 무엇보다 중요한데도 외교부는 부총리 자리를 겸직해보지 못했다. 대통령 다음 의전 서열에서도 미국은 부통령(상원의장 겸임), 하원의장, 연방 대법원장에 이어 국무부 장관이 5번째인데, 우리나라 외교부 장관의 의전 서열은 국회의장, 총리 등에 이어 18번째인 대통령 비서실장 바로 다음인 19번째다.   윤석열 정부가 포용외교를 위해 내년도 ODA 예산안을 올해 4조5000억원에서 44% 비약적으로 늘어난 6조5000억원으로 편성했다. 비록 국회 예산심의 과정에서 2000억원 이상 감액되었지만 전무후무한 예산 증액이다. OECD 개발원조위원회는 28개 회원국에 각국 GDP의 0.3%를 ODA 예산으로 지출하도록 권고하고 있는데 2022년 우리나라 ODA 예산은 GDP의 0.17%에 불과했다.   국격을 높이기 위해서는 경제력에 걸맞은 외교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국가의 소프트파워인 문화, 외교 등의 격이 올라야 경제도 살아날 수 있다. 국내 정치의 많은 문제로 인해서 한국이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여기가 정상이라고 ‘피크 코리아’를 말하니 걱정이다. 신자유주의 글로벌 경제 질서가 요동치는데 국내 정치는 정쟁에 여념이 없다. 이제 세계 전략을 설계하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는 없다. 외교부 장관이 부총리급 세계전략 사령탑이 되어서 국제사회에서 우리 외교력을 강화하고 국격과 경제력을 더욱 높여야 한다. 우리 국민의 피땀으로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여기가 정상이니 내려가라는 말은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2023.12.27 00:44